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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아이의 삶 04화

4. 우리, 잊지 않는 존재

막내이모와 DJ 홍진영-크렉 소금빵

by 은수

요약문장:

우리로부터 건너간 말이나 행동 하나가 그들에게 미래를 지탱할 힘이 될 수도, 그들을 주저앉힐 독이 될 수도 있다. 내가 건넨 말 한마디가 따뜻하길 바라는 것은, 기억은 때로 사랑보다 오래가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정말로 잊힌 기억이 있을까? 쌀을 씻고, 창문을 닦다가도 문득 스치는 과거 기억 속 장면들.

어쩌면 우리는 아무것도 잊지 않는 존재였다.

무의식 상태에서, 뇌는 암묵적으로, 또는 비자발적으로 기억을 소환한다. 이는 기본 네트워크와 기억 시스템이 자연스럽게 작동하는 증거다.

라디오에선 ABBA의 [Take a Chance on Me]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집안일을 하며 무심코 노래를 따라 부르던 나는 문득 오래된 사랑의 기억 하나를 떠올렸다. 내 사랑 말고 남의 사랑 얘기처럼 지루한 게 또 있을까?

하지만, 기억이 너무 강렬해서 그게 내 사랑이었나? 착각을 일으키는 그런 사랑이 있었다.


막내 이모와 DJ 홍진영!

갓 스무 살이 된 막내 이모는 안성에서 올라와 서울 우리 집에서 직장 생활을 했다. 국민학교 4학년이던 나는, 이모와 방을 함께 쓰며 자연스럽게 이모의 취향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내일 입을 옷을 미리 정리해 걸어두는 모습부터, 당시 유행하던 팝송과 화장품 향까지. 이모는 내게 세련되고 자유로운 어른의 세계를 최초로 보여 준 여자 사람이었다.


언제부턴가 이모의 귀가 시간이 늦어지더니, 엄마와 이모 사이엔 잦은 언쟁이 오갔다. 외가에서 서울로 올라온 이모를 보호자로서 챙기려는 엄마와 스무 살 이모의 갈등은 처음부터 예견된 것이었다. 한동안 심각했던 갈등이 잠잠해질 무렵, 하루는 이모가 내 손을 잡고 말했다.

“은수야, 이모랑 산책 갔다 올까? 아이스크림 사줄게.”

"아이스크림?"

나는 신나서 이모를 따라나섰다. 뜻밖에도 산책 장소는 음악다방이었다. 어두운 조명 아래 앉아 음악을 듣는 사람들. 그때껏 내가 상상도 해본 적 없던 세상에 첫 발을 디딘 순간이었다. 우린 바닥도 잘 뵈지 않는 어두운 통로를 지나 구석 자리 소파에 앉았다.


그때 마침 신나는 팝송이 흘러나왔다. 음악이 바뀌자 분위기마저 달라지는 것 같았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그 노래가 ABBA의 「Take a Chance on Me」였다. 노래가 나오자 이모는 어딘가를 보고 웃었고, 그곳 DJ 부스 안에 있던 홍진영도 이모를 향해 눈인사를 건넸다.


그날 이후, 나는 음악다방의 최연소 단골이자 이모와 홍진영의 비밀 연애를 돕는 수호천사가 되었다.

나는 이모와 함께 밤마실 가는 게 즐거웠고 뭔지 알 수 없지만, 음악다방에 가서 음악을 듣는 것도 좋았다.


홍진영은 (우리가 ) 이모가 도착하면 항상 ABBA의 [Take a Chance on Me]나 John Travolta의 [ 'You're the one that I want']를 틀었다.

이모를 통해 그 가사의 내용을 알게 됐을 때, 나는 꺅, 비명을 지르고 방바닥을 구르며 어쩔 줄 몰랐었다.

큰 키에 부드러운 머리칼을 가진 홍진영은 어린 내 눈에도 그동안 봤던 아저씨들과는 사뭇 달랐다.

사랑에 빠진 그 둘의 눈빛은 어린아이조차 속일 수 없었고, 나는 그것이 아마도 사랑일 거라 느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홍진영이 DJ일을 마치고 우리 셋은 함께 다방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그날은 평소와 분위기가 좀 달랐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뒤, 이모는 내 손에 아이스크림을 쥐여주며 말했다.


“은수야, 여기서 이거 먹고 있어. 이모 금방 올게. 절대 혼자 집에 가면 안 되는 거 알지?”

"응.. 이모, 금방 와야 돼!"

그때부터 나는 극장 앞 대로변에서 이모를 기다렸다. 하지만 금방 온다던 이모와 홍진영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자 극장 앞 거리엔 술에 취해 비틀대는 사람이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어떤 아저씨는 내게 다가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기도 했다. 무서웠지만, 나는 이모와의 약속 때문에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사실 그때 나는, 두려움보다 배신감 때문에 자꾸 눈물이 났다. 그동안 우리 셋은 정말 친하지 않았나. 근데 그 둘이 나만 따돌리고 사라졌단 사실에 난 무척 충격을 받았다. 이모는 오지 않고, 언제까지 밤길에 서있을 수도 없었다. 할 수없이 나는 어두운 밤길을 걸어 혼자 집으로 갔다.


대문 앞에 도착했지만, 나는 바로 벨을 누르지 못했다. 이모와 약속을 안 지키고 온 것도 걱정됐고, 무엇보다 엄마한테 혼날 생각을 하니 선뜻 용기가 나질 않았다. 하지만 이미 너무 졸리고 배가 고팠던 나는 용기 내 벨을 눌렀다. 그때, 이모와 나를 기다리던 엄마가 달려 나왔다.

"이모는?"

나를 본 엄마가 고함치듯 이모를 찾았다. 나는 겁도 나고 긴장이 풀린 탓에 그 자리에서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날, 내가 집에 도착한 건 새벽 2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그 일 이후, 엄마도 밤마실의 실체는 물론, 홍진영의 정체까지 알게 됐다. 이모와 엄마는 며칠 동안, 다시 안성으로 내려가냐 마냐 실랑이를 벌였다. 결국, 서울에 계속 있는 조건으로 이모에겐 외출 금지령이 내려졌다.

얼마 뒤, 이모를 만날 수 없게 된 홍진영이 술에 취해 친구들과 함께 우리 집 대문을 두드리며 소란을 피우기도 했다. 하지만 이 일은 엄마의 역린을 건드린 사건이 돼 결국, 이모와 홍진영은 헤어졌다. 요란했던 그 둘의 사랑은, 둘 뿐 아니라 곁에 있던 어린 수호천사의 마음까지 홀랑 태운 뒤 허무하게 끝나 버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이모는 맞선을 보고 공무원이라는 한 아저씨와 결혼했다. 나는 친절한 공무원 이모부가 싫지 않았다. 최소한 나를 밤길에 세워두고 사라질 것 같진 않았다. 하지만, 나는 공무원 이모부를 볼 때마다 자꾸 홍진영이 떠올랐다. 노력하지 않아도 자동으로 기억이 나서 괴로웠다.

'이모부, 이모부도 홍진영 알아요?'

그때, 공무원 이모부에게 꼭 묻고 싶던 그 말을 참는 심정은, 마치 위험한 사랑에 빠진 것만큼이나 충동적이고 아슬아슬한 감정이었다.


내게 '불같은 사랑'이란 단어가 남긴 것은 안타깝게도 ‘어둠 속에 홀로 남겨진 것’이나 ’ '녹아버린 아이스크림' 같은 이미지였다. 그렇게 홍진영과 이모의 사랑은 어린 내게 신뢰할 수 없는 어른의 모습으로 씁쓸히 저장되고 말았다.


그때, 내가 목도한 사랑은 겉은 바삭하고 속은 부드러운 것이다. 부드러움에 닿기 위해, 갓 구운 그것을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간 뜨겁고 단단한 겉면이 입천장에 상처를 내고 마는, 크랙 소금빵 같은 것 말이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건넨 경험과 말이나 행동은 그 어떤 형상도 될 수 있다. 그것은 성장하는 존재의 삶 속 어딘가에 숨어 있다, 암묵적 또는 비자발적 기억으로 불쑥 떠올랐다.


그것은 우리로부터 건너간 말이나 행동 하나가 그들에게 미래를 지탱할 힘이 될 수도, 그들을 주저앉힐 독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내가 건넨 말 한마디가 따뜻하길 바라는 것은, 기억은 때로, 사랑보다 오래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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