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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아이의 삶 02화

2. 1부-기억이 말을 걸면

기억 소분하기

by 은수
이 연재는- 과거기억에 대한 주도권을 되찾는 이야기입니다.
그저 지난 추억담이 아닌, 감정의 유산을 어떻게 넘길지에 대한 고민이기도 합니다.
결국, 트라우마를 재구성함으로 나의 돌봄으로 나가는 여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채에 내린 밀가루는 첫눈보다 고왔지만, 부주의한 한숨 따위에도 공중으로 흩어질 만큼 가벼웠다. 찰기를 갖기 전 가루는 애초에 방어라곤 할 수 없는 것에 불과했다. 나는 그 무력한 모습이 무심한 어른의 한숨에 휘둘리는 아이 삶의 상징처럼 느껴졌다.


나는 일주일에 한두 번은 빵을 굽는다. 채에 내린 고운 가루에 물과 이스트, 소금, 설탕과 계란을 조심스레 섞어보지만, 반죽은 쉽게 하나가 되지 못했다. 고약하게 손에 달라붙고 저항하듯 질척거렸다. 하지만 그럴수록 나는 손을 재빠르게 움직이며 집요하게 떼어내고, 다시 모아 또 치대면서 그것이 찰기를 갖도록 단련시켰다.

반복된 손 동작은 적잖이 힘이 드는 노동이지만, 내겐 명상이나 수행의 다른 방편처럼 느껴졌다. 온 생각을 손에 쏟아붓다 보면 잡념은 사라지고, 질척이던 반죽은 보드랍고 말랑하면서도 끈기 있는 하나의 덩어리가 됐다.


나는 그쯤에서 성공의 깃발을 꽂듯, 둥글고 매끈한 반죽 중앙에 검지 손가락을 찔러 넣었다. 손가락에 반죽이 달라붙지 않고 깨끗이 빠지면, 완성이다. 그때 느끼는 성취감이란!

엉뚱한 말 같지만 그럴 때 나는, 지금껏 살아 있다는 사실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렇잖은가? 각기 다른 삶을 산다지만, 한 존재로 태어나 50년 이상을 무탈하게 살아서 지금, 평온히 반죽을 치대는 현실이 어떻게 아무 일이 아닐 수 있을까.

나는 지난 기억을 종종 한 덩이 반죽에 빗대곤 했다.
좋거나 나빴던 기억과 상관없이 내 지난 기억들은 헝클어진 서랍속처럼 정리되지 못했고, 뭉쳐진 하나의 덩어리에 불과했다. 기억이 남겨둔 것은 날 선 피해자의 감정뿐이었다. 하지만 인간 삶이 그렇게 불편한 것만으로 뭉쳐진 한덩어리 일리 없다. 우리는 입체적인 존재였고, 삶의 시간 또한 각기 다른 맛과 결을 지녔다. 그런데 어째서 내 기억은 피해자 마음에만 머무는지 알기 어려워 답답했다.


아무리 잘된 반죽이라 해도 이 한 덩어리를 통째로 익혀선 맛있는 빵을 기대할 수 없다. 나는, 이제 소분될 수 없던 기억을 떼내 다양한 맛을 가진 빵부터 구워 볼 작정이다. 마침내, 피해자가 아닌 구조자의 오븐에 불이 켜지면, 고소하거나, 짭짤하고, 때로는 쌉쌀하지만 끝맛이 달콤한 따뜻한 빵이 만들어지지 않을까. 나는 그것을 죽지 않고 살아 낸 오늘의 모든 우리에게 건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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