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심과 신뢰
의심은 우리를 안전하게 하지만, 신뢰는 우리를 인간답게 했다.
어제저녁 무렵, 동네 마트에 들렀다. 자주 가는 마트는 아니었다. 복숭아와 자두를 골라 계산대 앞에 서자, 계산대에 있던 아저씨가 말을 건넸다.
“운동하고 오시나 봐요?”
그는 곧 옆에 있던 작은 요구르트 하나를 건네주었다. 사양하는 것도 예의가 아닌 듯해 나는 웃으며 받았다. 하지만 불투명한 플라스틱 용기 속에서 출렁이는 흰 액체는 이상하게도 나를 주춤하게 만들었다.
‘설마 동네 마트에서 나쁜 걸 주었을까?’ 싶은 마음이 들다가도, ‘혹시나…’ 하는 경계심이 그 뒤를 바짝 따랐다. 라벨조차 붙어 있지 않은 요구르트라니. 그 순간, “먹어도 괜찮을까?”라는 의심이 내 안에서 불쑥 고개를 들었다.
집에 돌아와 막내에게 요구르트를 내밀며 “먹을래?” 묻고, 표정을 살폈다. 아이는 곧장 표정을 바꾸며 물었다.
“엄마가 산 거예요?”
내가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아이는 엄한 표정으로 말했다
“엄마, 요즘 이런 거 함부로 받아먹으면 안 돼요!”
아이의 말에 나는 웃었지만, 그 웃음에는 씁쓸한 동의가 섞여 있었다. 어른과 아이 할 것 없이, 두려움은 이미 우리 몸에 새겨져 있었다. 우리는 어느새 타인의 작은 호의조차 의심하는 시대를 살고 있었다.
의심은 본래 인간을 지켜주는 장치였다. 낯선 소리에 긴장하고 경계하지 않았다면, 인류는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우리의 본능은 과잉 작동했다.
뉴스는 끊임없이 경고를 내보내고, 우리는 ‘타인은 위험하다’는 문장을 무의식 속에 암기했다. 믿음의 결말이 비극으로 돌아온 사건들은 우리 마음에 보이지 않는 흉터를 남겼다. 그 흉터는 언제부턴가 친절마저도 위험의 신호로 바꾸어 놓았다.
철학자들은 오래전부터 이 마음을 ‘불안’이라 불러왔다. 불안은 특정 대상이 없는 위협, 그러나 지워지지 않는 그림자였다. 그것은 타인으로부터만 오는 게 아니었다. 우리가 살아온 시대가 남긴 집합적 기억, 사회적 상처의 잔향이 우리 안에서 불안이라는 이름으로 속삭이는 것이다.
폴란드의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현대를 ‘액체 근대’라고 불렀다. 그 시대는 결속이 끊기고, 관계는 일시적이며, 신뢰는 곧 취약성으로 간주되는 시대였다. 모든 것이 빠르게 녹아내리고, 도망치듯 관계가 맺혔다 끊어지는 시대 말이다.
라벨 없는 요구르트가 그런 시대의 작은 상징처럼 느껴졌다. 이름 없이 건네진 선물은 이제 무명의 위험으로 해석됐다. 그러나 더 깊은 문제는 따로 있다. 의심은 단지 타인을 향한 태도에 머무르지 않았다. 결국 그것은 나 자신을 향한 불신으로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그렇게 의심은 관계를 고립시키고, 인간을 공동체적 존재가 아닌 폐쇄된 개인으로 만들 수 있었다.
나는 결국 그 요구르트를 마시지 못했다. 그것은 단순히 유통기한에 대한 의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미 내 안에 뿌리내린 불신의 습관, 타자에 대한 무의식적 경계심이 내 손을 멈추게 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 경험은 동시에 내 마음 깊은 곳에 질문을 남겼다.
나는 과연 타인을 믿을 수 있는 존재인가? 동시에 나는 누군가에게 믿을 만한 존재인가?
앞으로 다가 올 미래가 불안과 불신을 더욱 견고히 만들 가능성이 높다는 예측, 나는 그것 만으로도 마음이 숙연해지고 말았다. 왜냐하면 의심은 우리를 안전하게 할 수는 있지만, 신뢰야말로 우리를 인간답게 하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