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박자가 어긋날 때

선택

by 은수

삶은 대체로 안개처럼 흐려서 예측할 수 없거나 의식하지 못한 순간을 빠르게 지났다. 어쩌면 헤픈 마음은 그런 삶에서 타인과 박자를 맞춰보려는 순간이자, 박자가 어긋났을 때도 자리를 뜨지 않는 선택이었다.


조카가 오던 날, 나는 조카 부부에게 데이트할 시간을 주는 미션을 준비했다. 마치, 친정에 온 것처럼 맘 편히 아이를 맡기고 놀러 나가게 해주고 싶었다. 17개월 아이 육아를 하는 중인만큼, 무엇보다 의미있는 선물이 될 것 같았다.


준비한 식사를 마치고 조카 부부가 데이트를 나간 뒤, 나는 막내딸과 함께 아기를 데리고, 미리 대관해 둔 키즈카페로 향했다. 놀잇감으로 가득 채워진 장소다 보니, 우린 금세 친해졌고 예약된 세 시간이 후딱 지났다. 집으로 돌아와서 아이 입에 과일을 넣어주고, 품에 안아 재우며 나는 몇 번쯤 마음이 일렁거렸다. 그것은 아이의 품이 따뜻했을 뿐 아니라, 든든한 친정이 없는 조카의 사정이 가늠됐기 때문이었다.

그때 나는 조카에게 잠시나마 친정 노릇을 해주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타인의 어려움에 손 내미는 순간은 어쩌면 과거의 나를 구해내는 일인지도 몰랐다.


조카 가족은 이틀 더 여행을 하고 서울로 돌아갔고, 잘 도착했다는 문자가 왔다. 그런데 조카가 여행 마지막 날, 제주에서 카메라를 분실한 것 같다는 것이다. 카메라도 카메라지만, 여행 내내 찍은 영상을 잃어버린 것 때문에 조카는 잔뜩 풀이 죽어있었다.

공항으로 가기 전 식당에서 사용한 기억을 마지막으로 어디서 분실했는지도 기억이 없었다. 더구나 여행지를 떠나 이미 서울에 도착한 상황이다 보니, 조카는 다시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은 거의 포기한 상태였다.


"조카야, 걱정 마. 제주도에서는 생각 보다 물건 잘 안 잃어버려. 대부분 다 찾아!"

나는 자신 있게 말했다. 최소한 내 경험으론 사실이었다. 제주에 살던 지난 10년 동안 핸드폰이든 지갑이든 잃어버렸다 못 찾은 물건이 없기도 했지만, 어떻게든 찾도록 도와주고 싶었다. 무엇보다도 오랜만에 고모를 만난 제주 여행에서 카메라를 잃어버린 일이 뼈아픈 기억으로 남게 하고 싶지 않았다.


일단, 나의 헤픈 마음은 멘붕에 빠진 조카를 흔들어 깨워, 앞으로 해야 할 조치들을 줄줄이 나열했다.

1) 식당부터 지나쳐 온 곳에 전화해 연락처를 남겨두기.

2) 특히 공항 유실물 센터에 카메라 기종 등의 정보와 연락처 남겨두기.

3) 카메라의 시리얼 넘버 등록해 두기.

마지막으로, 유실된 물건이 나중에 신고되는 경우가 더 많으니, 조치 후 너무 걱정 말고 기다려보자고 조카를 안심시켰다.

"고모, 전 포기하고 있었는데, 희망이 보이는 것 같아요."

"응. 염려 말아. 어디 있기만 하면, 고모가 바로 찾으러 갈게!"


결국, 하루 뒤 카메라는 제주 공항 유실물 센터 사이트에 올라왔고, 내 장담 대로 조카는 카메라를 찾았다. 여행의 즐거웠던 순간과 우리가 반갑게 조우한 순간이 모두 박자를 맞추듯 제자리로 돌아온 것이다. 하지만 그 박자는 저절로 맞춰지지 않았다. 끝까지 상황을 외면하지 않는 선택을 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드디어 일이 해결되자 나는 안도와 동시에 지난 일이 떠올랐다. 그때도 역시 나를 보러 온 지인의 제주여행에 나쁜 기억을 남기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작동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때의 헤픈 마음은, 이번과는 결이 달랐다. 그저 누군가를 안심시키는 데서 멈추지 않았다. 내 헤픈 마음은 마치 고삐가 풀린 것처럼 점점 더 불편한 쪽으로 가더니, 더 많은 책임을 덮어쓸 곳에 나를 밀어 넣었다.


그 해 여름, 인천에 사는 친구 가족이 여름 방학을 함께 보내자고 했다. 친구 가족은 우리가 살던 바닷가 마을 근처에 위치한 풀빌라를 예약해 한 달 살기를 하기로 했다. 예약을 한몇 달 전부터 우린 모두 그날만 기다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린 그 여름, 추억에 신나는 박자를 맞출 생각에 부풀어 있었다. 박자가 어긋나 결국, 내 헤픈 마음의 끝이 어딘지 시험할 시간이 될 줄은 꿈에도 모르고 말이다.

안개처럼 흐릿하고 예측 불가한 삶은 한 치 앞도 미리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었다.


6화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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