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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물원킨트 Jun 10. 2024

결혼식의 멤버 (14)


29. 교실, 실내, 오후


현철이 칠판에 뭔가를 적고 있다. 슬램덩크, 짜장면, 러브레터, 타이타닉, 어바웃 어 보이, 택시 드라이버, 호모 사피엔스,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 개미, 질투는 나의 힘, 상처받지 않을 권리, 기생충. 끝이 없이 계속 쓴다.

 자막 “3개월 후”

한편 맞은 편 책상에 영수가 앉아서 현철이 쓰는 걸 지켜본다.


영수:

뭐 하는 거 지금?


현철:

내 인생을 살찌운 것들이라고 하기는… 너무 거창하고,

내가 재밌어 하는 것들을 써보고 있다.


영수:

왜?


현철:

내가 좋아하는 걸 다 이어보면 그게 나란 인간의 국경선 같은 거 아닐까?

뭐 계속 그 크기가 커지면 좋겠지만.

아니다, 너무 커져도 문제다. 내 몸무게만큼은 아니어야지.


영수:

너다운 소리네.


현철이 칠판구석에 ‘떠든 사람: 김민준, 국영수’ 라고 쓰고 ‘국’에 엑스표를 하고 ‘최’로 고친다. 현철이 손을 탁탁 털더니, 영수 쪽으로 다가가서 책상에 살짝 걸터앉는다.


현철:

어떻게, 잘 지냈어?


영수:

미안하다.


현철:

뭐가?


영수:

나는 그냥 진실을 말하고 싶었던 건데,

그게 동시에 남한테 죄책감을 떠넘기는 거란 걸 그땐 몰랐어.

지나보니 알겠더라. 내가 멍청했어. 미안해.


현철:

뭘 그런 걸 가지고. 그 정도는 기꺼이 받아줘야 친구지.

더 무거운 짐도 떠넘기라고, 받는 척하면서 슬쩍 피해줄 테니까.


영수:

그렇게 말해주니 다행이네.

근데 나는 왜 계속 방황만 하는 걸까?

애도 아니고 나이도 서른이 넘었는데.


현철:

이 세상 모든 어른들이 다 그렇게 살고 있어.

물 아래로는 미친 듯이 물장구를 치고 있다고.


영수:

정말 그런 걸까? 잘 모르겠다.

근데 넌 애들 가르치는 게 적성엔 맞아?

난 과외할 때 애들은 정말 못 견디겠던데.

애들이랑 같이 있다 보면 내 사고방식이 애처럼 변하던데.


현철:

그런 면이 없진 않지. 안 그러려고 해도 애들한테 스트레스 쌓이면

어쩔 땐 나도 애들한테 화내기도 해. 그때마다 나한테 깜짝깜짝 놀라지.


영수:

우리가 학생일 때 우리 가르치던 선생님들도 그랬겠지?


현철:

아마도. 근데 그 시절엔 그런 거 생각할 틈이 있나?

우리끼리 모여만 있어도 재밌었으니까.


영수:

하지만 언제부턴가 어른이 되고 각자의 길을 가고, 얼굴 보기도 힘들어지고.


현철:

우정도 생물이야. 피었다가 지고, 또 해가 지나면 다시 피기도 하고.


영수:

(현철이 쓴 칠판을 바라보며)

난 말이야. 몇 년 전부터 사는 게 정말 다람쥐 쳇바퀴 같아.

하루가 뻔해. 오전엔 논문 좀 뒤적거리고, 오후엔 강의 나가고,

저녁에 책 보고. 인이 박혀서 이젠 뭘 해도 감흥이 없어. 뭐랄까 이게 좀…


현철:

무기력하다?


영수:

응. 바로 그거네. 욕구도 욕망도 없고, 밥맛도 없고. 사는 게 재미없고.


현철:

음. 그럴 땐 말이지. (뭔가 생각하더니) 너 좀 일어나봐.


영수:

왜에?


현철:

일단 일어나봐.


영수가 좀 주저하다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현철이 영수에게 다가가더니 영수의 점퍼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한다. 안주머니도 뒤진다.


영수:

야, 뭐 하는 거야?


현철:

가만 있어봐.


영수:

야, 간지러워.


현철:

오, 반응 좋고. (바지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낸다) 여깄네.


영수:

뭐야? 너 무슨 경찰이야?


현철:

어디보자. (영수의 지갑을 열더니 지폐를 꺼낸다)

얼마쯤 될까? (돈을 센다) 3만 4천원. 오케이.

(자기 주머니에 돈을 집어넣는다)


영수:

(어이없어서) 야, 뭐 하는 거야? 내 놔.


현철:

거봐. 지금은 막 감정이 팔딱팔딱 뛰지? 무기력은 사라졌고.


영수:

(마지못해 인정하며) 뭐 그렇긴 하네…


현철:

사건 속으로 들어와야 해. 사건이 없으면 사건을 만들어서라도.


영수:

(한 방 맞은 얼굴이다)


현철:

넌 지금 미술관 그림 감상하듯이

세상을 고요하게 바라보고만 있는 거야.

이제는 그 미술관에서 나와. 진짜 세상이랑 부딪히라고.


영수:

내가 방관자였단 건가?


현철:

그런 면이 없지 않다고 봐. 넌 좀 일탈을 해봐야 돼.


영수:

일탈?


현철:

네가 하면 얼마나 일탈을 하겠어?

온갖 자기검열을 하면서 신중하게 결정하겠지.

하지만 가끔은 네 마음이 가는대로,

결과 따위 보지 말고 막 질러볼 필요가 있다는 거야.

넌 너무 오래 모범생으로만 살았다고 봐. 내가 본 너는 그래.


영수:

흠.


현철:

자, 그럼 3만 4천은 인생 수업료로 내가 갖는다.


영수:

야. 너무 비싸.


현철:

벌써부터 흥정까지 하려들고 발전이 빠르군. 하지만 어림없지.


현철과 영수가 장난치듯이 티격태격하는데, 노크 소리 들린다.

현철이 대답도 하기 전에 문을 열고 민준이 들어온다.


민준: (손을 들며) 어이, 오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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