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출에 관하여

김금희, 『대온실 수리 보고서』 독후감

by 세포뭉치

어릴 적, 그러니까 나이가 아직 한 자리 수에 머물 때의 나는 소위 ‘다정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학교에서 누군가 혼자 있는 사람이 있다면 먼저 다가가 말을 걸었고, 그들에 대한 배려를 나의 기쁨으로 삼았다. 처음 보는 사람의 매력에 쉽게 빠져들기도 했다. 낯선 타인과 단 몇 번의 대화로 친구가 되었고, 그럴 때 심장에서 뿜어져 나온 환희는 장애물 없이 손끝‧발끝까지 치달았다. 누구나 한번이라도 그 빠져듦을 경험해봤다면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를 것이다. 그런데 그런 내 모습을 본 우리 엄마는 늘 ‘너무 착하면 손해를 본다.’며 웃으면서 얘기하곤 했다. 분명 그 웃음에는 내 행동에 대한 긍정이 있었다. 다만 그것은 직접적인 발화의 내용과 정반대의 온도를 지니고 있어서, 나는 이런 말을 들으면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는 혼란스러운 상태가 되곤 했다. 조금 억울하기도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착한 건 나쁜 게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그 때에는 그랬다.


행복한 어린 시절을 지나서 표정보다는 말의 힘이 강해지기 시작할 때부터였을까, 괴상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마치 소크라테스의 ‘영적인 것(to daimonion)’처럼, 내 마음 속에 어떤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목소리’는 이렇게 울려퍼졌다: ‘감정을 받아들이지 마, 감정을 나타내지도 마, 늘 의심하고 생각해.’ 그렇게 몇 년을 목소리에게 시달리자, 어느새 나는 서울로 이사 온 영두처럼 되어 있었다. “아무도 누구도 관심 없다. … 그런 문장들을 마음속에 끊임없이 써보는, … 덜 웃는 아이가 되었다.”(84) ‘객관적으로’ 일어난 일이 무엇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의무교육 십 년을 거치며 내 시선이 점점 타인의 얼굴에서 땅으로 이동했고, 처음에 다채로운 색으로 그려졌던 기억들은 점점 무채색으로, 때로는 무無로 기록되어갔다는 점은 명백하다.


어쩌면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작중 주인공인 영두도 어린 시절 모종의 사건을 계기로 ‘차가운 실망 속에서 마음의 문을 닫아’(224)버린다. 그런데 우연한 기회로 맡게 된 대온실 수리 보고서 일이 다시금 영두를 차가움이 어린 그 장소로 이끌어 간다. 원래 영두에게 그곳에 대한 기억은 ‘창백하게 축소되어 초라해진’(22) 채로 남아있었다. 그러나 대온실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면서, 여러 시대에 걸쳐 대온실을 둘러싼 다양한 인물들을 알아가게 되면서 영두의 생각은 바뀌게 된다. 곤줄박이를 닮아 정을 주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제갈도희에서부터 그런 그녀에게 끌리는 왕 주무관, 어른보다 더 당당하고 씩씩한 산아, 격동의 시대를 말없이 버텨낸 문자 할머니, 비상한 재능과 열정의 후쿠다‧박목주 그리고 순전한 믿음으로 사람을 대하던 순신까지. 대온실 주변에는 결코 흑백의 감정이나 섣부른 몇 마디 말로 정리할 수 없는, 온몸으로 살아낸 역사들이 갓 잡아 올린 생선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누구나 살면서 복잡하고 머리 아픈 일을 겪는다. 하나의 자아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그래서 차라리 파산을 선언해 버리고 싶은 그런 일들을 말이다. 설령 그런 일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현대인들은 자기 자신을 절대적으로 안전한 무균실에 가두는 데에 익숙하다. 그 속에는 나를 불편하게 할 다른 어떤 것도 없기 때문에, 우리는 철저히 원자화된 채로 자신의 몸을 파먹으며 산다. 그러나 영두가 대온실 수리 보고서를 쓰면서 알게 된 것처럼 세상에는 내가 모르는 수많은 역사들이 숨 쉬고 있다. 책의 말미에서 문자 할머니가 넌지시 짚어주듯이 “인간의 시간과는 다른 시간이 언제나 흐르고 있다.”(403) 배양실 발굴의 결과를 보고나서 “기념도 추모도 없는 이 상태가 가장 진실에 가까워 보였다. 무언가 들어서 있다면 오히려 그 긴 이야기를 지우는 듯했을 거였다.”(396)라고 했던 영두의 말은 이런 거부할 수 없는 다양성을 받아들인 증표일 것이다. 나는 매주 자주, 원자화된 상태에서 깨어나 무균실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고 싶다고 생각한다. 대온실이 바깥의 햇빛을 여과 없이 받아들이듯 주변의 감각들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살아보고 싶다. 우연히 접한 『대온실 수리 보고서』의 통통거리는 인물들이 용기를 건넨다. 이번에는 나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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