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살던 고향은

예소연, 「아주 사소한 시절」 독후감

by 세포뭉치

현대인들에게는 고향이 없다고 어떤 철학자가 말했다. 그건 아마 현대인에게는 거의 선천적이라고 할 만한 강한 감정적 유대, 끊어낼 수 없는 뿌리와 같은 근원적 경험이 없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런데, 이런 담론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음에도 그런 말을 듣는 데에는 어쩐지 불편한 것들이 남아있다. 그것이 너무나도 네모지고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어 그것의 모서리 한 쪽을 툭 쳐서 흐트러뜨리고 싶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런 감정은 정합성이나 적확함에 대한 요구라기보다는 차라리 심술에서 비롯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삶에 관해서 어떠한 도형도 성립해서는 안 된다는 정당한 심술. 선과 선이 맞닿아 매끈한 도형이 탄생하려 할 때 그 안에 아직 숨 쉬고 있는 이야기들이 창백한 면으로 굳어지는 게 싫으니까. 그보다는 그동안 그려진 것들을 부정형의 무언가로, 더러운 흔적으로 남겨두는 편이 마음 편하다. 그런 마음으로 바라보는 추억 속 고향은 어떤 곳에 붙박이지 않은 채 언제나 진동하고 있다.


나의 살던 고향은 서울 남서부의 전형적인 빨간 벽돌집 동네였다. 서울 중심부를 피해 건설된 공장들이 산업화라는 중대한 임무를 마치고 새로운 외곽으로 밀려나던, 그래도 여전히 남은 한 두 개의 공장이 동네 아이들의 비염에 기여하던 그런 시절이었다. 나는 그런 동네에서 여느 아이들처럼 훌쩍이며 자랐다.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만 해도 나는 놀이터에서 만난 아이들과 곧잘 친구가 될 수 있었다. 놀이터에 깔린 모래를 뭉쳐 정성스레 수로를 만들고 물을 부으면 개울이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44)


「아주 사소한 시절」의 첫 문장은 어렸을 때를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공감할 만한 아름다운 문장이다. 과도하게 아름다웠던 어린 시절에 나는 희조와 비슷한 삶을 살았다. 심심할 때면 놀이터에 나가 모르는 아이들과 어울렸고 모래를 두들기고 콩벌레를 굴렸다. 손바닥만 한 동네는 돌아도 돌아도 새로웠고 매일 밤 성장통으로 다리가 부서질 듯 아파도 다음날의 햇빛을 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름다운 세계에서의 삶은 돌아보면 당연하게도 영원하지 않았다.


“어른들 따위는 어느 시점부터 자신이 지니고 있던 무언가를 너무도 쉽게 잊은 채로, 마치 그저 주어진 것인 양 생을 살아간다. 다 망가져가는 것과 다름없는 생을. 나는 그것이 세계가 나를 ‘외부인’으로 만드는 교묘한 방식이라는 걸 깨우쳤다.”(75)


데일정도로 뜨겁고 소스라치게 차가웠던 감각들이, 세상이 뒤집힐 듯이 울고 웃었던 일들이 언제 이렇게 시큰둥하게 변해버렸을까. 아름다운 세계로부터 나를 납치해낸, 새로운 질서의 음험한 포옹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그토록 중요했던 문제들이 쓸쓸히 삶의 외곽으로 사라지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초등학교 2학년, 학교신문에 시를 써내 표창을 받은 내게 뜻밖에 쏟아졌던 질시의 눈빛을 느꼈을 때부터? 초등학교 4학년,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이 현실에서 받을 수 없었던 인정을 찾아 한두 명씩 뒷골목으로 사라져가는 걸 지켜보게 되었을 때부터? 어쨌거나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후, 나는 희조처럼 “친구에게 함부로 비밀을 털어놓지 않으며 고작 그들이 원할 만한, 그럴듯한 비밀만 내어주는 청소년이 되었다.”(75-76) 어쩌면 어린이들이 그토록 바라듯, 성공적으로 무신경한 어른이 되었다. 그랬던 어른들이 나중에 그 바람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우습기는 하지만 말이다.


내가 아직 본가에서 살 때, 엄마는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하고 자주 노래를 불렀다. 노래를 부르는 순간의 엄마는 참 신나보였다. 그렇지만 나는 그 노래를 들으면 거의 반사적으로 짜증이 났다. 공동생활을 하는 아파트에서 그렇게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다니? 그것도 나이에 맞지 않는 동요를. 그런데 지금 그 경험을 떠올리면 왠지 모르게 애틋한 마음이 든다. 그 애틋함은 어디에서 온 걸까? 이제는 좀처럼 노래를 부르지 않는, 소파에 누워 제목도 모르는 드라마를 멍하니 들여다보는 엄마의 얼굴에서? 아니면 여느 평범한 현대인들처럼 고향 없이 떠도는 내 존재에서? 그런 생각을 하자면 이름 모를 중요한 것을 기억도 나지 않는 곳에서 잃어버린 듯한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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