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연, 『당근밭 걷기』

by 세포뭉치
돌을 태운다
사실은 돌 모양의 초


돌이 녹는 모양을 본다
돌 아래 흰 종이를 받쳐두어서
흐르는 모양 잘 보인다
너는 시간을 이런 식으로 겪는구나
너는 네게 불붙인 손 사랑할 수 있겠니


굳은 모양을 보면 어떻게 슬퍼했는지가 보인다
어떻게 참아냈는지가

「간섭」 일부



나는 남들이 잘 눈치 채지 못하는 여러 습관을 가지고 있다. 이를테면 웃을 때 혀를 살짝 내미는 습관이 그렇다. 혀-내밀며-웃기는 부끄러움을 너무 유난스럽지 않게 가리는 역할을 한다. 나는 이 습관을 아버지에게서 배웠다. 좀처럼 웃지 않는 아버지는 친척들이 모인 자리에서 종종 이렇게 웃는다. 소년같이 수줍게 웃는 모습에서 내 표정을 발견할 때의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묘하다. 벽이나 계단 손잡이 등을 두드리며 다니는 습관도 있다. 보통 기분 좋을 때 리듬을 타면서 나오는 행동인데, 군 복무를 하던 시절 선임에게서 온 습관이다. 모호한 것에 대해 이야기할 때 손가락을 오므리는 제스처를 사용하는 습관은 대학 시절 지도교수에게서 배웠다. 나는 그 오물거리는 제스처가 심연으로부터 말을 끌어올리는 데에 도움이 된다고 굳게 믿고 있다.


재미있는 점은 내가 습관을 배워온 세 사람 모두 지금은 가까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버지와 동네의 야트막한 언덕을 넘어 목욕탕에 가던 기억, 7개월 차이가 나는 선임과 내기 오락을 하던 기억, 학부생의 신분으로 지도교수와 스스럼없이 의견을 나누던 기억은 여전히 선명하지만 그 때의 감정은 지금의 감정과 놀라울 정도로 겹치는 부분이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들이 내게 남긴 것이 단순히 기억 몇 장면 뿐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들은 내게 와서 나를 뒤흔들었고, 그들의 살을 녹여내어 나의 그것과 섞었다. 엄밀한 의미에서 나의 그 습관들은 내가 그들에게서 배운 것이 아니라 그들로부터 스며들고 새겨진 것이다. 그 특정한 동작, 의식하지 않고 흘러나오는 움직임들은 내가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왔던 모양이고 사랑했던 증거이고 나 아닌 것과 관계했던 흔적이다. 단적으로 나는 내가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다른 모든 존재들과 열기를 나누고, 녹고 녹이며 서로를 향해 무너지고 섞이는 중의 한 장면을 때때로 의식할 따름이다.


시작은 매혹이다. 위악적으로 말하자면 필요에 의한 선택일 수도, 결함을 채워줄 거라는 환상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지나간 일들이 실제로 어떠했는지에 대해서 사람은 전적으로 무지하다. 그러니 좋다, 그 일들에 대해 누가 무엇이라 불러도 상관없다. 다만 명백한 것은 서로 간에 어떤 인력이 작용했다는 점이다. 서로에게 당겨지는 사람들은 문득 그들 일상의 행로에 간섭이 일어나고 있음을 느꼈을 때엔 이미 되돌릴 수 없이 멀리 왔다는 것을 별수 없이 인정해야만 한다. 아쉽게도 매혹의 순간은 길지 않다. 그 다음 순간부터, 아니 어쩌면 매혹의 바로 그 순간부터 상대의 세계에서 출발한 이물질들이 밀려온다. 그 외계 물질들은 살을 긁고 찢다 못해 피부 속으로 침투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매혹은 근원적으로 자기 파괴적인 일이다.


그 치열함, 고통과 슬픔 그리고 그것들과 정확히 같은 말로서의 기쁨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굳어간다. 우리는 도처에서 파괴, 그 끝에 부서진 채로 남은 잔해를 본다. 그 잔해들이 침묵으로 말을 건넨다. “빗방울의 언어가 얼룩으로만 쓰여지듯 / 흰 종이가 흰 종이인 채로 남아있더라도 / 말해진 것이 있다고”(「갈망」 일부) 종이 위로 쉴 새 없이 서로 다른 먼지들이 쌓이고 날아가며 종이 면의 곳곳에 인사를 건넸다는 사실을 불현듯 깨닫는다. 화려한 상점 위 허름한 모자처럼 얹혀있는 2층 가정집을 본다. 때때로 창문이 열리고 닫혔을 것이라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된다. 사랑니를 뽑고 절대로 아물 것 같지 않게 덜렁거리던 입안의 살점이 어느새 아물어 있는 것을 느낀다. 뼈가 단단하게 차오른 잇몸위로 매끈하게 누워있는 사랑니의 옛 자리를 혀로 두드려 본다. 거짓말처럼 고요하다.


모든 시간이 다 자국이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꽁꽁 언 얼음 아래서 들려오는 기척
아직 있다

「토끼굴」 일부


가만 보면 세상은 무너져 내리는 것들뿐이다. 그래서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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