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세 살 무렵,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할머니는 삼 형제를 혼자 키우셨다.
막내였던 아빠는 일찍 결혼한 누나와 군대를 간 형의 자리를 홀로 채워야 했다.
공부와 운동을 잘했던 아빠는 홀로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할머니의 손을 놓지 못하고 자신의 학업을 포기했다.
할머니와 함께 장사도 하고, 막노동판에서 일을 배우며 아빠의 입은 점점 거칠어졌다.
장사, 막노동에서 살아남기 위해 술을 배웠고, 그 술은 고약한 술버릇으로 변해 갔다.
술이 들어간 아빠는 말이 많았다. 그 말속엔 언제나 상대를 향한 비난과 후회로 가득 찼다.
어려운 가정 환경으로 공부와 운동을 놓아야 했던 아빠는 늘 말씀하셨다.
“아빠 소원이다. 너는 공부 많이 배우고 잘해라.”
울면서 애원하는 아빠의 반복되는 부탁은 점점 무겁고 무서웠다.
성적표 결과에 따라 아빠의 표정도 변했다. 성적이 좋으면 공주가 되었지만, 아빠가 만족하지 못한 결과를 가져오면 이내 죄인이 된 듯 고개를 숙여야 했다.
그런 아빠 앞에서 하고 싶은 말도, 울고 싶은 마음도 다 숨겼다.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이 자식에게라도 이어지길 바라며 몸이 부서지라 일하는 아빠를 보면서 자책하는 나를 마주했다. 아빠를 기쁘게 해 줄 한 가지가 공부란걸 안 순간부터 공부를 잘하고 싶었다. 하지만 우리 집은 공부와는 어울리지 않는 공간이었다.
고성, 싸움, 술 냄새 두려움과 긴장 속에서 책을 펴는 일은 지옥이었고, 마음이 불안했다.
성적은 불안한 나의 마음을 대변하듯 수직으로 하강하기 시작했다. 그 속에서 나는 매일 무너지고 있었다.
친구에게도, 선생님에게도, 엄마에게도 말하지 못한 감정들이 성을 쌓기 시작했고, 결국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 아이로 성장했다. 사랑의 조건이 공부라는 자신의 꿈은 아니었겠지만, 아빠가 내게 준 사랑은 조건부 사랑이었다. 아빠가 보여준 사랑을 보면서 결국 부모도 사랑을 표현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긴 시간 동안 묵묵히 입을 닫아야 했던 내가 엄마가 되었다. 아이를 혼낸 날이면 억울하고 밉고, 슬픔 감정을 묵묵히 삼키고 있는 아이에게서 내가 보인다.
아이를 보면서 결심한다. 내 아이만큼은 슬프면 울 수 있고, 무서우면 말할 수 있고, 화가 나면 표현해도 괜찮은 아이로 키우겠다고 말이다.
나의 마음을 묵묵히 들어주는 한 사람. 남편에게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