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병원은 나와는 거리가 먼 곳이었다. 큰 병 없이 자란 것도 있지만, 감기나 열 같은 잔병이 걸려도 엄마는 병원보다는 약국 약이나 민간요법으로 삼 형제를 치료했다. 감기 기운이 있으면 생강차를 끓여주시고, 배가 아프면 바늘로 손과 발을 따고, 소화제를 먹인 후 등을 쓸어내려 주셨다.
우리 가족은 병을 예방하기보다, 아프고 나서야 병원을 찾았다. 그렇게 나는 치과라는 곳이 세상에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대학생이 될 때까지 단 한 번도 그곳의 문턱을 넘어본 적이 없었다.
우리 집과 친할머니댁은 고작 한 블록 차이에 있었다. 집보다 더 자주 드나들었던 곳이 할머니 댁이었다. 할머니는 붙임성 좋은 나를 유독 아끼셨고, 나는 그 사랑을 온몸으로 느끼며 자랐다. 할머니는 자주 병원에 가셨고, 집에는 약봉지가 무더기로 쌓여 있었다.
시간이 맞을 때면 나는 종종 할머니와 함께 버스를 타고 병원에 동행했다. 버스 안에서 할머니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병원 대기 시간엔 편의점 어묵을 하나씩 먹는 것이 나에게는 작은 행복이었다.
그날도 평범한 하루였다. 대학생이 된 어느 날, 할머니는 내게 치과에 함께 가자고 하셨다. 처음엔 그저 동행이라 생각했다. 치료를 기다리며 복도에 앉아 있는데, 갑자기 간호사가 내 이름을 불렀다. 당황했지만 별생각 없이 따라 들어갔고, 나는 어느새 치과 의자에 앉아 있었다. 잠시만 기다리라는 간호사의 말에 심장이 요동쳤다.
곧 할머니가 다가오셨다.
“그냥 검사만 받아보자.” 할머니의 그 말에 나는 조금 안도했고, 의사가 들어와 검진을 시작했다. 그는 내 치아를 하나씩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숫자가 올라갈수록 내 안의 불안도 함께 올라갔다.
“총 치료 할 치아는 18개입니다.”라는 말에 나의 표정은 굳어졌고, 이어진 설명에 더욱 당황스러웠다.
“충치는 작지만 여기저기 퍼져 있어요, 아말감 치료는 개당 3,000원인데 10년이 지나면 다시 뜯어내고 치료를 해야 합니다. 은이나 금으로 씌우는 방법도 있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어요?”
의사의 말이 끝나자마자 나는 고개를 돌려 할머니를 바라보며 말했다.
“할머니, 나 치료 안 받을래요.”
나의 거절에 할머니는 한숨을 쉬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할미가 치료비 낼 테니 치료받자. 계속 놔두면 커서 고생해. 아빠한테는 할미가 전화할게.”
곧바로 아빠에게 전화를 건 할머니는 의사의 설명을 그대로 전했다. 통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아빠의 말은 냉담했다.
“지금 돈도 없는데 무슨 치료를 한다는 거예요. 그냥 데리고 와요.”
그 말에 할머니는 참을 수 없다는 듯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대학생이 되도록 치과 한 번 안 왔으니 애 이가 이 지경이지. 은니로 씌우자. 돈은 어미가 낼게.”
잠시 정적이 흐른 뒤 아빠는 한숨을 쉬며 짧게 말했다.
“정 할 거면 아말감으로 해요.”
그리고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은 할머니는 다시 나를 다정히 설득했고, 결국 나는 생애 첫 치과 치료를 시작하게 되었다. 진료 의자에 앉은 나는 온몸에 힘이 들어갔고, 입을 여는 것도 버거웠다. 그런 나를 보며 의사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연신 “괜찮아요.”라고 말해 주었다. 의사의 말과 그 옆에서 따뜻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할머니의 보살핌에, 나는 잠시 대학생이 아니라 초등학생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시간이 흘러 치과 치료를 받은 지 10년이 지났다. 나는 엄마가 되었고, 아이를 출산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가 아프기 시작했다. 출산의 고통이 채 가시기도 전에 시작된 치통은 밤잠을 앗아갔다. 그러던 어느 날, 젤리를 씹다 어금니에서 소리가 났다. 급히 뱉어 보니 예전 치료한 어금니의 아말감 조각이었다.
작고 까만 조각 하나.
그 조각을 손바닥에 올려놓은 채 한참을 바라보다가, 문득 할머니가 생각났다.
나를 처음으로 치과에 데려가 이를 치료해 주셨던 할머니.
아빠와 말다툼 끝에 ‘은니로 씌우자. 돈은 어미가 낼게. “라며 나를 감싸주시던 그 목소리와 치료받는 내내 나의 손을 잡아주시던 그 손길이 그리웠다.
할머니는 이미 하늘나라에 계시지만, 그때의 기억은 내 가슴 깊숙이 나를 감싸고 있다. 할머니에게 받았던 따뜻한 사랑은 시간이 지나도 선명하게 나를 감싸며, 오늘을 살아갈 힘과 용기를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