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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다리딩 Jul 22. 2021

압도적으로 무수한 생명들 속에서 산다는 것

엄마는 늘 물을 허투루 쓰지 않으셨다. 수도꼭지 틀면 콸콸 나오는 물인데 굳이 공을 들여 목욕하고 남은 물, 아이들이 물놀이하고 남은 물, 처마 밑으로 똑똑 떨어지는 빗물 알뜰살뜰 모아다가 텃밭 야채 물로 뿌려주셨다. 물을 옮기는 품이 더 들어, 그냥 호스로 물 주라고 해도 꼭, 꼭 그러셨다.



마흔이 넘도록 그런 엄마의 물 아낌이  이해가 안 됐는데, 오늘에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 풀들이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보고야, 하루가 다르게 바짝 말라가는 집 앞 계곡 물을 보고서야.


무성히 무섭게 자라는 서늘하기까지  무수한 잎들을 본다. 물은 정맥 동맥이 되어 마구마구 뿌리로 수급되었지만 역부족이었다.

대지의 생명들은 무섭도록 물을 쫙쫙 빨아 당겼다. 물을 주고 돌아서면 반나절만에 땅은 갈라져 말라있고, 들은 금방이라도 곡기를 끊고 죽을 것처럼 시들어 있었다.


내가 튼 수도꼭지의 물은 대지가 이렇게 말라가는데, 어디서 온 것일까?


엄마가 집을 비운 사이, 나는 비가 오면 빗물을 받으려고 마당에 대야를 놓아두고, 아이들의 남은 목욕물을 힘들게 마당으로 퍼다 날랐다.


태양이 산을 넘어가고서, 강렬한 노을만 하늘에 번지고서야 한 줄기 서늘한 바람이 우리 뺨을 스쳤다. 첫째와 나는 차를 한잔씩 타서 마루에 앉아 어두워져 가는 하늘을 가만히, 아주 가만히 바라봤다. 우리들 사이로 귀한 시간이 흘러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뜨거운 공기를 타고 피어오르는 모기향이 우리를 되돌릴 수 없는 귀한 시간 속에 담기게 했다.


"후, 오늘은 어땠어?"

"행복했어."

"왜? 무슨 행복한 일이 있었어?"


아이는 꽃밭에 훌쩍 큰 부처꽃을 보다가 시선을 거두어 나를 돌아봤다. 한없이 맑고 애잔한 눈빛으로 나에게 산뜻하게 말했다.


"엄마, 이렇게 살아 있는 것들이 많은데, 어떻게 안 행복할 수가 있어. 매일매일 이렇게 풀도 자라고, 꽃도 피고, 벌레들이 자꾸 찾아오는데 하나도 안 시시하잖아."


나는 아이의 말에 감동해 미소가 올랐고 아이는 덤덤히 차를 마시며 자신이 저녁에 물 주어 다시금 생기를 머금은 꽃과 채소들을 바라보았다.



'압도적으로 많은 생명들 속에 살아간다는 건, 굉장히 행복한 일이구나. 번거롭기도 하지만 열심히 살아가는 삶을 깨닫게 해주는구나. '


나도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다. 주말만 만나는 자연, 한 철 만났던 자연과 다르게 한 시절을 시골마당에서  보내면서 우리는 조금씩 단단해지고 있다. 강한 햇볕에 그슬리면서 가뭄을 이겨내면서 살아내고 있는 생명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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