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은 잠시 나를 바라보며 웃었다. 나는 그의 옆으로 가서 나이 든 그를 찬찬히 훑었다. 그는 여전히 입꼬리 미세한 근육까지 있는 힘껏 움직일 줄 아는 인간이라 입술선이 초승달처럼 아름답게 꼬리선을 만들어냈다. 그 가장자리가 반짝였다. 금니였다.
"너는 결혼 안 할 줄 알았더니, 결혼했다며? 남편은?"
"왜, 너만 기다릴 줄 알았니?"
"그래 주길 바랐지. 너만은."
그는 나만큼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만나지 못할 거라고 했지만 나와 결혼은 할 수 없다고 했다. 그건 현실적인 문제라서 그러하다고 했다. 그리고 어리고 예쁘고 부유하고 사랑스러운 아내와 결혼을 했으면서 가끔 나에게 문자를 했다. '그래도 네가 그리워, 이건 현실적이지 않은 차원에서.'라고 문자를 보냈다.
그 문자가 역겨워서 내가 사랑했던 남자도, 내가 아꼈던 과거의 한 부분도 역겨워져서 나는 핸드폰 번호도 바꾸고 그와 나의 연결고리인 사람들도 끊었다. 그래놓고도 어떻게든 연결고리를 찾아 연락하는 그가 좋아서 받아주었다.
그는 끊길 듯 끊어지지 않는 무엇인가였다. 지금 그의 옆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자니 그 무엇은 내가 끊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지 않았나, 결국은 그를 이토록 진실하게 사랑하고 오래 기다렸으면 언젠가는 한 번은 돌아봐주지 않을까 기대했다.
그는 나와 헤어져서도 내가 그를, 그가 물들어 있는 모든 시간을, 소중히 간직할 거라는 걸 너무나 잘 아는 인간이어서 나는 오랫동안 착각하고 있었다. 훈만큼 나를 잘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없을 거라고.
그의 손 끝이 나의 손을 조심스럽게 와닿는다. 내가 빼지 않자 그는 더더 힘을 실어 내 손 위로 침범한다. 새침했던 그의 눈빛에 욕망이 실린다. 아무런 욕망, 지금 이 순간에 치솟는 욕망이. 마음대로 했다가는 후회할 욕망이. 그의 눈빛이 뜨겁다고 생각할 때쯤 그의 핸드폰 진동이 울린다.
불이 켜지지 않은 거실에서 그의 핸드폰 화면은 명확히 밝았고 나는 그 화면에 발신인 '아내'가 뜬 것을 보자 달아올랐던 열기가 금방 식는 것이 느껴졌다.
예민한 남자가 그 열기를 허겁지겁 잡으려고 입술을 갖다 댄다. 그의 얼굴을 최대한 무안하지 않게 하려고 애쓰며 외면하자, 그가 피식 웃는다.
"이럴 때도 배려하는 너. 큭큭, 너 키스까지는 됐잖아."
"와이프한테 전화 오잖아. 가 봐."
"그래, 가야지. 너는 언제나 내가 선을 넘지 않도록 하지, 그래그래, 너는 그런 사람이지. 나는 매번 오늘은 혹시나 하면서 오지만 결국 안심하게 돼. 이런 너라서."
나는 언제나 깨끗한 마음으로 그를 사랑하고 싶었다. 그래서 선을 지켰다. 선을 지키는 것은 내가 정한 가장 정갈한 마음과 몸의 상태였는데 언제나처럼 나보다 내 마음을 빠르게 읽는 훈은 그걸 알았다. 그에게 나는 선을 넘지 않을 가장 안전하고 편안한 여자였음을 그가 결혼하고 아내가 만삭일 때 비로소 알게 되었다.
결혼 후에도 자주 보내왔던 문자. 여느 때처럼, '뭐해 바빠로 시작되는 문자. 어디서 지내?' 나는 뭐 어때, 결혼했지만 선을 안 넘고 그냥 얼굴만 보고 오면 되지라고 일부러 의연히 만나서 밥을 먹거나 차만 마시고 금방 헤어졌지만 나는 안다.
그는 살면서 설렘이라던가 과거에 빛나고 순수 같은 것들을 나를 통해 확인하고 복기해보고 싶어 한다는 것을. 잃어버린 시절, 회귀할 수 없는 그때에 대해 잠시나마 같이 나누고 싶어 한다는 것을. 그에게는 그 행위가 과거였지만 나는 언제나 과거에서 나아가 미래도 꿈꾸고 싶은 미련을 애써 감추고 있었다는 것을. 아마 늘 나를 빨리 읽는 훈은 그런 나의 마음을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헤어질 땐, 왜 결혼 안 해, 너도 해야지라고 선을 그었던 것일 게다.
훈은 내가 그의 할아버지를 어린 시절 흠모하며 가장 바람직한 남자 어른으로 각인되어 있음을 알고 나의 마음이 필요한 순간마다 다정하고 편안한 모습을 매번 보여주었다. 얼음장 같다가도 햇빛처럼 보여주는 그 따스한 찰나에 나는 사죽을 못썼다. 그러다가 그는 내가 귀찮아지면 돌아갔다, 본래 자신만이 최고인 세상으로.
"그래, 얼굴 봤으니까 됐다. 마지막으로 보고 싶었어."
"마지막?"
"응. 나도 결혼했으니까. 이제 너 마지막으로 보고 서로 진짜 연락하지 말자고. 결혼한 네가 연락 올 때마다 솔직히 실망스럽고 역겨웠거든. 나도 너한테 그런 느낌 좀 주고 싶었는데 너는 그게 좋았나 봐."
훈은 다정함을 거두고 싸늘해졌다. 그리고 돌아서며 자신보다는 상대가 더 상처받아야 하는 것이 자신의 세상에 법이라는 듯 말했다.
"나 알고 있어. 네 남편에 대해서. 친구들이 이야기하더라고."
끝까지 모른 척하는 법이 없고, 상대에 대해 오만한 훈, 밉고 역겨운데 그래도 참 좋았던 훈. 그가 문을 닫고 살아남아야 하는 세상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자 내가 살아남아야 하는 세상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