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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서림 Jan 10. 2023

오후의 빛

문장소감 365 #day8


새해 다짐으로 시작한 문장읽고 브런치에 소감글 남기기. 건너뛰는 날이 생기기 시작했다. 문장소감 365. 문장이라기보다는 인상적인 글표현들을 수집하고 무질서하게 기록한다는 편이 정확하다.


오늘은 오후의 빛을 표현한 시들을 찾아봤다.

태초에 빛이 있었고, 인간은 동전의 양면처럼 빛과 어둠을 주기적으로 왕복하며 살아간다. 빛은 삶의 가장 근원이며, 배경이다. 빛은 태양과 지구의 관계에서 탄생한다. 지구는 태양 주변을 돌며, 자전하기에 태양의 얼굴을 마주했다, 등지기를 반복한다. 이제 막 신선하게 떠오른 태양과 마주한 아침에는 희망과 설렘을 느끼곤 한다. 정오를 지나, 지구가 점점 태양과 등지고  밤을 향해 나아가는 오후 그림자가 길어진다. 이제 곧 어둠이 드리우겠지. 밤은 깜깜하고, 춥고, 무엇이 튀어나올지 몰라 두렵다. 그래서일까? 밤을 향해 가는 오후의 빛에서 서늘한, 스러져가는, 소멸해가는 것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느껴지는 표현들이 많았다


천천히 기울어지던 햇빛이 툭 부러지듯 꺾였다. 바닥에 새겨진 글자가 사라졌다가 새로 돋아 일렁이길 반복했다. 나른한 정적과 햇빛만 보자면 더없이 평온해 보이는 오후였다.
  (밤의 행방 - 새 소설 03 안보윤)

천천히 기울어지던 햇빛이 툭 부러지듯 꺾인 것은, 해가 이제 막 도시의 서쪽 스카이라인 아래로 잠겼거나, 산너머로 숨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주 얌전히 명함이나 타이프 용지처럼
햇빛 한 장이 들어온다, 김은 블라인드 쪽으로 다가간다

오후 4시의 희망-기형도

블라인드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을 '명함'이나 '타이프 용지'에 비유했다. 햇빛의 질감과 두께감이 연상된다.



햇볕들은 줄지어 어디로 가는 걸까
웅성웅성 가장 근심스런 색깔로 서행하며
이미 어둠이 깔리는 소각장으로 몰려들어
몇 점 폐휴지로 타들어 가는 오후 6시의 참혹한 형량

노을-기형도

햇볕은 때론 무리를 이루기도 한다. 노을 지는 하늘의 색깔은 '근심'이라는 마음을 가졌다.

소각장에 드리운 햇볕은 몇 점의 폐휴지와 함께 타들어 간다. 화형식. 소각장에 드리운 햇볕을 보고 참혹한 형량을 떠올린 시인은 어떤 일을 겪은 걸까.


너에게는 피에 젖은 오후가 어울린다
죽은 나무 트럼펫이
바람에 황금빛 소음을 불러댄다

어울린다-진은영

시의 마지막 구절은 이렇다. (현재 교보문고 정문 사인에 걸려 있는 문구이기도 하다.)


"너에게는 내가 잘 어울린다.

우리는 손을 잡고 어둠을 헤엄치고

빛 속을 걷는다"


피에 젖은 오후가 어울리는 사람에게 잘 어울리는 '나'. 교보문고 문구를 봤을 때는 뭔가 사회 통합, 공동체 의식, 새해의 희망메시지 같은 것일까? 새해니까 대략 그런 메시지이겠거니 했는데, 오늘 '오후'를 표현한 시들을 찾다가 전문을 암송하게 되었다. 앞부분은 역시, 진은영! 감각적인 시어들이 뉴런을 자극한다.


피에 젖은 오후가 어울리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피에 젖은 오후는 어떤 시간일까? 단순, 노을 지는 시간을 직유한 것일까? 어떤 사회적인 사건을 지나온 것을 의미할까? 이도 아니면 감각 그 자체일까? '너'에게 느껴지는 무의식 깊은 곳에서 연상되는, 자동으로 소환되는 무질서한 언어? '피에 젖은 오후'는 여러 가지 의문을 떠오르게 한다. 결론 없이 맴도는 생각들. 어쩌면 시인이 의도한 것인지도 모른다. 감각적인 세계로의 초대. 그러나 그 파티를 즐기는 것은 너의 몫이라는 듯.


오후를 표현한 시를 찾아보며, 시인마다 다른 정취와 감각을 지니고 있어 세상은 하나이지만,  각자의 세계관 속에서 재현되는 멀티버스(multiverse) 어렴풋이 실감한다. 나의 오후가 피에 젖어 있다면, 너의 오후는 나른하고 평온한 솜이불 안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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