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지만 큰 울림이 있는 말이었습니다
저는 10년 이상, 마케팅 회사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많은 영광의 순간, 좌절의 순간 그리고 이도 저도 아닌 미생의 순간들이 그 10년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저희 집안의 기준 상, 공식적으로 돈 쓰는 존재(학생)에서 돈 버는 존재(직장인)가 된 이후, 제 피부에 가장 와닿은 말!
일은 니 뜻대로 되지 않아
우리는 희망을 교육받고 자랍니다. '너는 할 수 있어', '잘 될 거야', '할 수 있다', '될 일은 된다'와 같은 긍정의 주문은 분명 무언가를 성취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몇 번의 좌절에도 뭔가를 이뤄내고, 심지어 잘하고, 이 사회에 이바지할 것에 스스로 부응한 많은 순간들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그 순간들에 비례하게 또는 좀 더 빈번하게 그 반대되는 상황에 놓이곤 합니다.
'니 뜻대로만 되지는 않을 거야, ' '처음 기획이 끝까지 그대로 가란 법은 없어', '일이 뜻대로 되지 않거나, 방향 전환을 요구받는 일이 일상다반사야' 웰컴, 투 리얼 월드!
실패가 일상일 거라는 얘기는 학교에서는 들어보지 못했거나, 들었어도 그다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실패나 거절, 반려는 그래서 몹시도 씁쓸하고 적응이 되지 않았습니다.
제조회사 PM(프로덕트 매니저)입니다
저는 지금 회사에서 몇 군데 부서를 거쳐 프로덕트 매니저로 일하고 있습니다.
현 소속 회사는 제조와 유통 체인을 모두 가지고 있는 중견 화장품 회사입니다. 제 업무 범위는 상품 기획, 개발, 론칭 전략 수립과 실행에 해당됩니다.
매일매일 회사 내 유관부서와 아이디어 회의, 역할분담, 실행, 이슈 발생, 해결방안 모색, 수정 실행, 경과보고, 결과물 도출, 평가 등의 과정을 반복합니다. 당연하게도 유관부서와 부대낌이 많습니다. 우리에겐 공동의 목표가 있고, 문제가 생기면 나 몰라라 하기보다는 '되는 쪽으로 해보자'는 분위기가 있지만 N명이 모이면, N개의 해석과 N개의 의견이 상충합니다. 누군가의 아이디어는 혁신성에도 불구하고 현실 문제(당장의 이익)에 부딪혀 매몰되는 현실을 자주 접합니다. 혁신성이 각광받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되는 쪽으로 일의 의사결정은 내려집니다. 수익 창출 또는 가치 창출이 되는 상품 기획과 출시까지의 전반적인 일정관리, 역할관리를 하는 것이 제 롤입니다.
도미노처럼 연쇄적이고 유기적으로 얽혀 있습니다.
비물질 창작물 또한 마찬가지겠지만 실물 창작물의 경우, 개발 중간에 소위 '일이 빠그라지거나', '이 산이 아니래, 저 산인가 벼' 하고 방향 전환을 요구받는 순간 연쇄적으로 많은 유관부서들이 일을 중단하고 방향을 바꾸기 위해 시간과 비용을 투여해야 합니다. 작은 부자재 하나 바꾸는 일인데 규격이 달라지고, 금형을 다시 제작하고, 공정 라인 테스트를 다시 해야 합니다. 당연하게도 출시 일정이 뒤로 밀리게 됩니다. 상품을 제 때 출시하지 못하면 론칭 전략이 수정됩니다. 계절성 상품은 출시 시기가 연기되면, 목적했던 바를 이루기 어렵습니다. 여름에 출시할 파라솔을 가을에 출시하면 그 상품을 출시하고자 했던 본래의 목적, 피서객에게 시원한 그늘을 선사하지 못하며, 기대감이 없는 상품은 수익창출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개발비용은 고스란히 손실로 떠안게 됩니다.
중간에 일이 틀어지곤 합니다.
그런 일은 종종 벌어졌습니다. '이 사양이 아니고 저 사양으로 해 주세요.',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려요.' 고객, 트렌드, 경영진 이슈에 따라 개발 중간에 상품의 방향이 바뀌곤 합니다. 내용물, 포장재, 디자인 중 무언가가 바뀌면 이제까지의 기회비용이 아까운 생각이 듭니다. 큰 이슈가 아니라면 그냥 현재의 방향성을 유지하면 안 될까요? 경영진의 의사결정이 이미 내려졌다면, 단언컨대 현실을 받아들이세요.
담당자인 당신이 열 받는 건 당연합니다.
시속 100 킬로미터로 달리던 차가 갑자기 시속을 0킬로미터로 낮춘다면, 바퀴와 엔진에 커다란 무리가 갑니다. 타이어가 지면과의 마찰력에 밀리고 저항하며 가열되어 끼익 소리를 내고 도로 위에 기다란 스키드 마크를 남기듯, 담당자들도 잘 진행하던 일을 부정당할 때, 또는 수정 지시를 받을 때, 혈압이 치솟고 마상(마음속 상처)이 길고도 깊게 남습니다.
타고난 성격에 따라 발현되는 방식은 다르지만, 다들 '이건 아니야', '수정', '중단'이라는 단어들에 머리가 아프거나, 몸이 아프거나, 마음이 아프기 시작합니다.
매일 아침 이메일 구독 서비스로 전달받는 '행복한 경영' 같은 메일링 구독 서비스는 '흉터는 훈장이다'는 문장과 함께 실패에서 얻은 상처가 삶의 훈장이 되는 법이라며 직장생활에 도움이 될만한 명언을 배달해 줍니다.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마케팅 수신동의에 따라 매일 아침 배달되는 그 편지를 제목만 보고 휴지통으로 이동시키거나, 눈으로 반쯤 읽다가 창을 내립니다. '그 말은 나도 하겠다' 이기죽거리기도 합니다. 모두가 그런 건 아닙니다만, 일단 열 받은 담당자에게 이 편지는 당장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먼 훗날 조금 상황이 객관화된 뒤에는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 편지들이 언제나 무용지물인 것은 아니에요.
담당자가 단순히 자기 뜻대로 일이 되지 않는다고 열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이 일에 얽혀 있는 유관부서 모두의 시간과 노력, 비용 손실에 대한 책임감을 엄중하게 받아들이고, 그간의 노력이 무용지물이 되어 아쉽고 안타까워 상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일이 꼬인 당신과 제가 열 받은 것은 매우 당연합니다.
좀 식히고 갈게요
그런 통계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연차가 올라갈수록(=일이 뜻대로 되지 않은 경험이 쌓일수록)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선호할 확률이 높은 거 같습니다. 뜨거워진 가슴을 식히고 차분히 다음 단계의 할 일들을 정리하도록 뇌가 충분히 각성되어야 하거든요.
저도 그렇지만, 제 동료들도 알고 있습니다. 불가항력이라는 것을요. 만약 기획단에서 미처 고려하지 못한 치명적인 오류를 뒤늦게 발견한 것이라면 당연히 담당자가 먼저 상부에 보고하고 방향을 수정하고 이를 보고하여 책임질 것은 책임지고 일을 마저 진행해 나가면 됩니다. 중견 제조회사의 프로덕트 매니저가 책임질 실수라는 것은 비용 손실이 크지 않았고, 회사도 그 책임을 무턱대고 개인에게 뒤집어 씌우지는 않습니다.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은 아니지만 제 경험상, 급여를 '토해내거나' 감봉을 당하거나, 일자리를 잃는 일은 없습니다. 윤리적 이슈가 아니라면요.
그럴 때 느끼는 감정은 분노나 거부감보다는 좌절감, 열패감, 수치심과 좀 더 가깝습니다.
그러나 기획이나 설계상의 문제가 아니라 실체가 모호한 '고객의 니즈'로 둔갑한 '경영진(투자자)의 뜻'으로 개발 중단, 개발 수정을 요구받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런 경우는 앞서 말씀드린 저항감과 울화의 감정이 지배적일 수 있습니다. 고객과 투자자 앞에서 '제가 맞습니다!'라고 주장할 용자들은 많지 않기에 담당자들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울화를 식히고, 각자 자기만의 대나무 숲을 찾아갑니다.
한 발 물러나 생각합니다.
가슴은 여전히 뜨거울 수 있습니다만, 머리가 좀 식고 시야가 넓어져 상황을 좀 더 객관화하여 본다면, 그때부터 알량한 월급쟁이의 현실 자각 타임이 찾아옵니다. 그동안의 기획을 뜯어보고 어디가 문제였을까? 제품 자체가 문제일까? 그것을 포장하고 설명하는 워딩이 매력적이지 않은 걸까? 트렌드가 바뀌었나? 고객들의 니즈가 변화했나? 경영진의 시각인 양 가설을 검증하고, 지난 과정을 평가해봅니다.
다시 한번, 일은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런 뒤에도 '아니야, 역시 내가 맞았어!'하고 생각이 든다면 그 담당자는 '윗 분들'을 설득할 충분한 근거와 논리가 필요할 것입니다. 당신은 그 촘촘히 확보한 논거로 다시 한번 다윗이 되어 골리앗을 상대로 도전을 해 볼 수도 있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그때 감수해야 할 리스크는 두 배가 되어 있음을 인지해야 합니다. 두 번째 설득 실패는 당신에게 '융통성 없는 고집불통'의 오명을 덮어씌울 수도 있으니까요. 얻는 것보다 잃을 것이 크다면, 당신의 애초의 가설이 옳다는 확신이 커도 현재의 이익을 지키는 것이 더 현명합니다.
빠른 태세 전환, 순발력이 스트레스로부터 당신을 구원할 것입니다.
기획의 수정 또는 중단에 수긍하고 빠르게 태세 전환에 임하는 것이 전체적인 심신건강에 이롭습니다.
현대의 근로자들과 사업가, 투자 초심자들의 성공한 삶을 위한 내로라하는 각 분야 전문가, 그루(GURU)들의 금과옥조 같은 가르침에 빠지지 않는 '회복의 힘', '복원력'이 필요한 때입니다. '우디르급 태세 전환'까지는 아니더라도 열을 식히고, 상황을 객관화해 본다면, 지금 빠르게 변화를 받아들이고 앞으로 다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누가 알겠습니까. 새로운 방향 전환으로 개발된 상품이 예상했던 것보다 좋은 반응을 이끌어낼지요. 그런 일은 기대도 안 한다고요. 한 가지 일에 복수의 가설 검증 시뮬레이션은 가능하지만 현실세계에서 복수의 결과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어떤 결과가 도출되든 그 결과는 나름대로의 성과 과를 남기게 되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우리가 선택한 길과 선택하지 않은 길 사이에 절대평가 같은 건 불가능합니다. 그러니까 괜찮습니다. 결과가 어찌 되었든, 빠른 태세 전환으로 당신이 당신의 오늘을 구원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