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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윤당 Feb 15. 2021

속으로만 삭였던 허무함의 대폭발(2)

정 많이 주지 말라했는데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을 하다가도 책을 읽다가도 가만히 누워 쉬다가도 문득, '이런 타이밍에 갑자기 왜..?' 하고 떠오르는 노래들이 있다. 떠오르는 이유야 나도 나를 잘 모르겠으니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예상하자면, 매체에서 숱하게 다뤄서 기억하거나 혹은 노랫말이 강력하게 와 닿았다거나 둘 중 하나이지 않을까. 그런 연유로 요즘 흥흥 거리는 흥얼리스트 중 하나는 신신애 님의 <세상은 요지경>이다. 


  "세상은 요지경~ 요지경 속이다~ (중략) 짜가가 판친다~"


 이 노래가 나왔을 시절엔 단순히 재밌는, 코믹한 노래로 인식됐을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에 와서 다시 들어보니 시대를 너무 앞서 나간 노래가 아닐까. 이 노래에 대한 나의 평은 그렇다. 

 하루가 멀다 하고 사방팔방에서 폭죽 터지듯 팡팡 터지는 크고 작은 사건들. 자극적인 요소가 버무리 된 막장 드라마가 왜 계속해서 나오는지 아니, 그 막장의 실존설을 입증하는 '이 사람이 이랬네 저 사람이 저랬네.'등등 판을 치는 이야기들. 그래서 <슈가맨 3>에서 세상은 요지경을 들었을 때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아주 제때 찾아왔다고.

 흥얼리스트 중 또 하나는, 요즘 상위권으로 급상승한 김지애 님의 <얄미운 사람>이다.  


 "정주고 마음 주고 사랑도 줬지만~ 지금은 남이 되어 떠나가느냐!

  이별의 아픔일랑 가져가다오~ 아~~~ 얄미운 사람"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서? 

 짝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백했다가 차여서? 

 애달픈 연애사를 갖고 있어서? 


 절절까진 아니어도 가슴속에 OO한 연애사는 하나쯤 품고 있긴 하지만, 적어도 이 노래를 흥얼거리는 나의 시선은 '연애'에 머무르고 있지 않다. 다양한 공간에서 만난 사람들과 나의 '관계성'에 주목한다.


 




 '그렇게 정 주는 거 아니라고 했는데.'


 누구나 그렇듯, 사람과 사람 사이가 연결되고 유지되는 과정에서 때로는 좋았다가 때로는 괴로운, 숱한 경험들을 반복적으로 해왔었다. '정' 때문이었다. 푸를 청에 마음 심이 붙어 만들어진 이 글자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오가는 무언의 기운은 탁하지 않은, 깨끗하고 맑은 상태이며 사람의 온기 또한 품고 있어 따스하다는 걸 축약하고 있다. 


 정이 오간다는 건 나의 일부분이 오가는 것이기 때문에 휘둘리기에도 좋은 재목이 아닐 수가 없는데, 그럴 때 번번이 나는 '왜 이런 결론밖에 나질 않는 걸까.' 상대의 잘못이 분명 있음에도 내가 더욱 문제였지 않았을까, 하는 자책감이 스스로를 좀먹으며 지냈다. 이십 대 때 한참을 그러다 서른을 넘어가면서부터는 맞고 틀리는 게 아니라 사람들 모두 서로 다르게 살아왔기 때문에 각자의 태도와 방식이 있고, 그게 어우러지는 부분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는 거라고, 그렇게 나름의 정리를 마쳤다. 이후의 나는 1인칭 시점에서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관계를 바라보고, 정을 나누는 것 또한 진심 60% / 자본주의 40% 비율로 조제해 차곡차곡 저장해 두고 있다. (늘 느끼는 거지만 자본주의가 장착된 미소는 최고다.)


 그럼에도 정은 참 무섭다. 특히, 순도 100%의 진심만 담긴 '정'이 불쑥 튀어나올 때마다 심장이 어찌나 쫄깃하던지. 쫄깃에서 그치면 다행이지만 쫄깃이 저릿으로 바뀌면 더욱 곤란해진다.






 지난 8월 언제쯤이었을까, 회사에서는 내 후배에게 안녕을 고하려 했었다. 이유는 업무의 효율성이었다.


  "무슨 말씀인진 알겠으나, 당장 통보를 하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분과도 저는 얘기를 잘 나눈 적이 없어서 어떤 분인지 잘 모르겠어요. 회사가 갖고 있는 불만을 한 번에 다 해소시키는 게 쉬운 건 아니지만 차근차근 같이 해 나가볼게요. 일단 유예 기간을 주세요. 해보겠습니다." 


 잘은 기억나지 않지만-자리에서 일어나기만 해도 방금 무엇을 했는지 곧잘 까먹는 요즘 시대인-상사에게 저런 뉘앙스로 말을 했던 것 같은데 아무튼. 사실, 그 후배는 직급은 내가 위일지라도 맡고 있는 브랜드가 전혀 달라 관여할 게 없었고, 그렇기에 그 사람이 정확하게 어떤 업무를 어떻게 진행해왔는지도 모르고 알 리도 없었다. 더군다나 어떠한 교류도 없었던 사람이었으니 나로서는 후배에 대한 파악이 우선이었다.


 부서 이동한 지 4개월 만에 제대로 된 대면을 하려니 괜찮을까, 앞서 걱정이 들긴 했지만 유예 기간이 길지 않으니 최선을 다해 신속하게 처리해보자 마음을 먹었는데 웬걸. 업무에 대해 하나씩 물어보며 체크할 때마다 후배는 나에게 방어적인 태도로 선을 긋고 있으니-본인이 해야 할 콘텐츠 기획 관련해서 방향성 및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더니 내가 해놓은 거 그대로 적어놨길래 "왜 내용 수정이 안 돼있어요?", "대리님이 하신 거니까 대리님이 손대셔야죠." 같은 말을 하더라.-내가 괜히 유예 기간 달라고 한 건가, 그냥 참견하지 말 걸 그랬나,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는데, 아니 근데 왜 저런 태도로 일관하지? 내가 싫은 거야 뭐가 싫은 거야 등등 후회와 짜증과 허탈과 꺼지지 않은 희망의 불씨까지 머릿속에서 휘몰아치고 있었다. 






 와, 이걸 어떻게 감당해야 하지... 유예 기간을 무를까 말까 며칠을 고민하다 '그럼에도 마음 잡고 해 보자. 후배도 후배 나름대로의 고충이 있었으니까 저렇게 날이 서지 않았을까. 답답한 게 있다면 풀 수 있게 도와주고, 내세워야 할 게 있다면 앞에서 드러낼 수 있게 도움을 주자.' 마음 단단히 먹고 후배에게 계속해서 다가갔다. 


 그렇게 다가가기를 수일이 지난 어느 날, 후배가 톡을 보내왔다. 혹시 바쁘시냐고, 괜찮으시면 지금 본인이 하고 있는 일을 도와줄 수 있겠냐는 요청의 문자. 도와줄 수 있다고, 괜찮다고 답을 하자 후배는 나에게 먼저 영상 파일을 하나 보내고 내 자리로 찾아왔다. 


  "영상에 대해서는 대리님이 더 잘 봐주실 것 같아서 도움 요청드렸습니다."


 




 이 업무를 시작으로 후배와 나는 자연스럽게 말도 트고-반말이 아니라 일상 대화 같은 것들-업무 관련해서 의견을 주고 받든 회의를 진행하든 막힘없이 술술 진행하게 됐던 것 같다. 그리고 선후배 관계가 아닌, 언니와 동생의 사이로서도 한 발짝 더 다가가기도 했다. 이럴 때 언니 말 들어서 나쁠 거 없다, 우리 여기서 지내는 동안 개인적으로 이런 거 해보면 어떨까, 건강도 챙길 겸 우리 운동도 다시 시작하자, 요즘 어느 동네 가봤더니 많이 달라졌더라, 어느 카페가 그렇게 좋더라, 그 와중에 연애에 대한 얘기도 가끔 곁들이기도 하고. 

 조심스러운 부분도 분명 있지만 후배 본인도 경계를 낮추고 다가오기까지 얼마나 고민했을까, 앞으로 더 잘하면 되겠지, 이제야 한숨 좀 돌린다며 활짝 웃었었는데.


 그때였다. 걸어 잠가 놓았던 마음의 빗장을 풀고 다가가자며.

  '이 사람한테는 그래도 정을 나눠주어도 괜찮겠구나. 그렇다면 나는 따뜻하게 감싸안아야지.'


그런데, 그 마음에 독을 타고 사라질 거란 걸 그때의 나는 알았을까.

아니,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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