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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uybrush Feb 16. 2021

prologue : 벌거벗은 전화

나는 어떻게 웹소설 작가가 되었나

2019년 어느 날 점심 무렵, 씻으려고 옷을 막 벗었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함께 소설을 준비 중이던 편집자였다. 나는 잠깐 망설였다. 


이 전화를 받을까 말까.


당시 나는 <드라켄>이라는 서양 정통 판타지를 웹소설 플랫폼 문피아에서 130회로 완결 내고 새로운 웹소설을 쓰고 있었다.


<드라켄>의 성적은 처참했다. 첫 장편소설을 유료로 출간하며 5권 분량으로 마무리 지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약 9개월에 걸쳐 소설을 썼지만 수익은 형편없었다. 돈으로만 따지면 소설 쓸 시간에 알바를 하는 편이 훨씬 나았을 것이다. 흔히 웹소설은 돈을 잘 번다고 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특히 당시 나에게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드라켄>은 퍼블리싱 형식만 웹소설 방식을 따랐을 뿐, 사실 웹소설이 아니었다. 그때 나는 웹소설이 지켜야 할 문법, 캐릭터성, 전개 방식 등을 전혀 몰랐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때까지 나는 거의 종이책만 읽었고, 웹소설은 유명하다는 소설 몇 편을 앞부분만 깨짝깨짝 읽은 게 전부였으니까.


나는 아무런 준비도 없이 웹소설에 뛰어들었다. 사실은 웹소설을 조금 얕잡아 보고 있었던 것 같다. 나도 이 문제를 알고는 있었다. 머리로는. 그래서 다음 웹소설은 철저히 트렌드를 분석해서 정말 웹소설 답게 쓰겠다고 다짐했다.


<드라켄>을 끝내고는 유명한 작품을 읽어보고, 회별로 진행 방식과 캐릭터 등을 분석했다. 그러다 운 좋게 웹소설 매니지먼트(일종의 출판사)와 계약하고 다음 작품을 준비했다. 작품 전체 기획을 짜고, 초반부 원고를 작성하면 편집자에게 보냈다. 하지만 내 원고는 번번이 퇴짜만 맞았다.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주인공이 이야기를 주도하지 않는다.

기대감이 생기지 않는다.

뒷이야기가 궁금하지 않다.

이야기 중간에 장르가 바뀐다.

주인공이 감정 과잉이다 등등.


편집자가 전화를 했다는 것은 뭔가 할 말이 있다는 뜻이고, 그건 좋지 않은 신호였다. 수정할 내용이 얼마 안 되면 톡으로 수정사항을 주고받으니까. 전화가 왔다는 건, 그 자체가 내가 보낸 소설에서 손 볼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님을 뜻했다.


마침 전화가 왔을 때 나는 샤워를 하려고 옷을 홀딱 벗고 화장실로 향하던 참이었다. 팬티 한 장 걸치지 않고 벌거벗은 상태였다. 그래도 전화를 하면 짧게는 몇 분은 걸릴 텐데. 일단 샤워를 하고 나중에 다시 전화할까?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일단 전화를 받았다. 수정 사항을 몇 가지 듣고 길어야 몇 분이면 통화가 끝나겠지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편집자는 당시 내가 7회까지 쓴 소설의 전체적인 문제점을 쭉 설명하더니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작가님, 지금까지 100회 이상 읽은 헌터물이 몇 작품이나 되세요? 읽어 본 작품 제목 좀 불러 주세요.


이 질문을 듣는 순간, 나는 몸에 걸친 옷만 벗은 게 아니라 내 정신까지 완전히 벌거벗은 상태가 되고 말았다.


그때 나는 남성향 웹소설에서 가장 흔한 장르인 헌터물(혹은 레이드물)을 쓰고 있었다. 이 장르는 세상에 갑자기 정체불명의 괴물이 쏟아져 나오고, 평범하던 주인공이 괴물을 잡는 헌터로 각성해 싸울수록 점점 강해지면서 돈과 권력, 명예까지 모두 손에 넣는 이야기다.


여기서 복잡하게 괴물이 어디서 왔고, 사람은 왜 각성하며, 헌터들이 싸우는 무기가 왜 서양 판타지처럼 칼이나 창이고, 게임 같은 아이템이 있는지 등을 따지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갑자기 세상이 변하고, 그 와중에 별 볼 일 없던 주인공이 새로운 능력을 얻어 세상의 중심으로 급부상해서 원하는 모든 것을 손에 얻는 것이 핵심이다. 그 과정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고, 얼마나 재미있는지가 중요하다.


그런데 편집자가 보기에 당시의 나는 헌터물의 요건을 전혀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원고를 썼다 고치고, 또 썼다 고치기만 몇 달째 반복하고 있었다. 그러다 결국 내 백그라운드 지식을 체크하기 위해, 편집자가 저 질문을 던진 것이다. 나는 나름대로 준비하면서 읽었던 소설을 떠듬떠듬 대답했다. 고백하자면 그때 제목을 말한 소설 중에서 100회까지 읽지 않았던 작품도 있었다. 거짓말까지 했지만 나는 소설 열 편도 채우지 못했다.


웹소설은 기본적으로 장르물이다. 장르소설은 독자가 그 장르에서 기대하는 이야기가 따로 있다. 더구나 헌터물과 같은 일상에서 결코 일어날 수 없는 판타지물은 더욱더 그렇다. 그런데 나는 남다른 헌터물을 쓰겠다면서, 사실은 장르의 기본 요건조차 갖추지 못한 채 그저 괴물과 헌터만 등장하는 소설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나침반이 고장 났는데, 방향을 아무리 바꾼들 목적지에 똑바로 도착할 리 없었다.


그 전화를 끊고, 나는 몇 달이나 매달렸던 헌터물에서 손을 뗐다. 내가 하루 이틀 준비해서 제대로 쓸 수 있는 장르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으니까. 심지어 나는 여전히 웹소설의 문법이 무엇인지조차 제대로 깨우치지 못한 상태였다. 돌이켜보면 나는 내 멋대로 기존 웹소설을 천편일률적이고, 진부하다고 깔보고 있었다. ‘비록’ 웹소설이지만 나만의 참신하고, 종이책만큼 깊이있는 소설을 쓰겠다고 생각했다. 정말 멍청한 객기였고, 대책없는 시건방이었다.


장르의 문법을 창조적으로 파괴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장르의 문법을 마스터한 창작자뿐이다. 편집자의 질문은 여전히 익숙한 방식을 고수하려는 내 마음의 갑옷을 산산이 부숴버렸다.


마흔의 나이에, 이때까지 오직 종이책만 읽었던 사람이 웹소설을 쓰려면 소설에 대한 고정된 관념을 모두 깨부숴야 한다는 것을 그때서야 진정으로 깨달았다. 그리고는 어땠을까?


정말 웹소설 주인공처럼 새롭게 각성해서, 곧바로 다음 웹소설을 멋지게 써내서 대박을 쳤다면 좋았겠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 후로도 몇 달 동안 장르를 바꿔가며 새로운 소설을 쓰고, 수정하고, 버리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해를 넘겨 2020년에야 비로소 웹소설다운 웹소설, <NBA 만렙 가드>를 썼다. 처음 목표로 했던 200회를 넘겼고, 내 예상보다 더 많이 팔렸다. 대박은 아니었지만, 나에게는 무엇보다 값진 성공이었다.


웹소설은 일일 연재를 기반으로, 독자가 회마다 결제해서 본다. 내 첫 소설 <드라켄>은 130회 중 가장 구매수가 높은 회차가 마지막회였고, 구매수는 10이다. 회당 가격이 100원이니, 마지막회 매출액이 1,000원이라는 뜻이다. 반면 <NBA 만렙 가드>는 230회 중 가장 구매수가 높은 회차가 53회이고, 구매수는 3,724(2021년 1월 12일 기준)이다. 53회 매출액은 372,400원이 된다.


웹소설을 잘 모르시는 분들은 이런 차이가 무엇을 뜻하는지 쉽게 감이 잡히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별로 상관없다. 앞으로 쭉 따라오다 보면 금세 알게 될 테니까. 




이 책은 웹소설 작법서가 아니다. 내가 어떤 과정을 거쳐 진짜 웹소설을 쓰게 되었는지 과정에 대한 이야기다. 지난 3년간, 마흔이라는 늦은 나이에, 웹소설 작가로 발돋움하기 위해 겪었던 과정을 최대한 세세하게 기록했다. 그것은 내가 지난 40년간 견고하게 쌓아왔던 하나의 세계를 부수고,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고 만들어나가는 과정이었다.


웹소설은 연재 기간이 길다. 보통 짧아도 6개월이고 대부분 1년 정도는 연재가 이어진다. 가끔 몇 년에 걸쳐 수천 회를 연재하는 작품도 있다. 연재가 워낙 길다 보니 연재과정에도 기승전결이 있고, 희로애락이 공존한다.


웹소설이 관심을 받으면서 웹소설 작법서도 늘고 있다. 그렇지만 작가가 연재 도중 단계마다 어떤 과정을 겪고, 어떤 문제에 부딪히며, 어떤 고민을 하게 되는지 말해주는 책은 아직 보지 못한 것 같다.


이유는 간단하다. 성공한 웹소설 작가는 모두 다음 작품을 쓰기 바쁘기 때문이다. 아무리 팔려봤자 웹소설만큼 돈이 되지 않을 게 뻔한 에세이를 쓰는 것보다 빨리 다음 작품을 구상해서 연재하는 편이 웹소설 작가에게는 훨씬 낫다. 그런데도 내가 이 에세이를 쓰고 있는 이유는 내 지난 시간을 정리하고 싶었고, 또 그냥 쓰고 싶었기 때문이다.


후반부에는 무수한 시행착오를 거치며 내 나름대로 깨달은 웹소설의 원칙에 대해 썼다. 이미 크게 성공한 작가들에게는 공기처럼 너무나 당연해서 언급조차 하지 않을 요소들, 그러나 웹소설을 쓰기 위해서는 반드시 염두에 둬야 할 내용을 적었다.


만약 당신이 웹소설을 쓰려고 한다면, 특히 여러 차례 시도해도 유료화의 벽을 뚫지 못하고 있다면 아마 이 책이 상당히 도움이 될 것이다. 혹은 웹소설이 무엇인지, 도대체 종이책으로 보던 소설과 웹소설이 어떻게 다른지 궁금한 사람, 혹은 그냥 웹소설 작가의 삶이 궁금한 사람에게도 내 경험이 꽤 재미있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럼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때는 내가 처음 웹소설을 알게 된 2017년으로 돌아간다.



안녕하세요. Guybrush입니다.

브런치에 이 글을 쓴지도 어느새 1년이 넘었네요.


<대기업 때려치우고 웹소설>이 내용을 더욱 보강하여 책으로 출간 되었습니다.

2부는 <NBA 만렙 가드> 이후 2021 문피아 공모전에서 <야구 몰라요>를 실패하고, 다시 <갓겜의 제국 1998>을 쓰는 과정이 추가되었습니다.

3부 역시 웹소설 쓰기의 원칙 여러가지가 추가되었습니다.


더욱 보강된 <대기업 때려치우고 웹소설>을 지금 읽어 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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