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 뭐부터 읽을까? - 시작하는 독서가들에게
여기서 잠깐 책을 대하기 어려워지는 순간에 주목해보자. 책은 게임과 같은 상호작용이 불가능하다. 살아있는 작가와 책을 매개로 이야기를 나눌 수는 있지만 책 그 자체와 상호작용할 수는 없다. 책은 닫혀있는 매체라 책의 내용과 형식이 완고해보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인지 독자들에게는 고전적인 강박이 있는데, 이 강박이 책읽기를 불편하게 만든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강박들에는 별 장점이 없는 것 같다. 의외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책을 읽으면서 이렇게 해도 된다는 걸 '굳이' 말씀드리고 싶다.
1) 저자의 말에 동의하지 않기
교과서의 영향 때문인걸까? 종이에 적혀있는 텍스트는 정답이라는 아우라를 갖는다. 어쩐지 이 말들을 내가 반드시 동의해야만 할 것 같고, 받아들여 내 삶에 반영해야 될 것만 같은 묘한 인상이 있다.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저자가 책에 써놓은 말들이 전부 옳지는 않다. 저자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 것은 독자의 권리다. 반드시 명확한 근거가 있어야 비동의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책의 내용을 남에게 설명해야 한다거나, 공적인 자리에서 활용해야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그냥 읽다가 '아닌 거 같은데?' 라고 생각해버릴 수 있다. 소설을 읽다가 전개가 말이 안 되면, 이상한데? 라고 중얼거리고, 사회비평을 보는데 공감이 안 되면 '정말 그런가?'라고 책 귀퉁이에 써넣을 수도 있다.
독서교육에서 가장 강조하는 덕목 중 하나는 '비판적 읽기'다. 책은 생각할 수 있는 여유를 만들고 나의 속도에 맞추어 읽어나갈 수 있기에 비판적 읽기에 유리하다는 데 동의한다. 하지만 그래서 책의 내용을 비판하려면 반드시 명확한 근거를 내가 갖추고 있어야만 할 것 같은 강박이 생긴다.
비판은 직관에서 시작할 때가 많다. 지나간 경험의 총체가 보내는 신호에 집중하면 뭔가가 꺼림칙하고 쎄한 느낌을 포착할 수 있다. 그 느낌은 한 명의 독자가 가질 수 있는 아주 소중한 재산이다. 억지로 저자의 말에 다 '아니? 아닌데?"라고 토를 달면서 읽는 일도 나름 재미있다. 그러다보면 자신의 부정이 어디는 억지고, 어디는 억지가 아닌지도 선명해질 수 있다. 내 비판에 명확한 근거를 덧붙일 수 있을지 없는지는 나중에 따져보아도 늦지 않다.
2) 다 읽고나서 그냥 잊어버리기
책을 읽고나서 내용이 기억나지 않으면 시간을 버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책이 다른 콘텐츠에 비해 들여야하는 집중력과 시간이 더 많기 때문인지, 앞서 언급한 책의 아우라 때문인지 알 수는 없지만 책의 문장이나 줄거리가 기억나지 않으면 헛읽었다고 치는 경향은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드리고 싶은 이유는, 일단 책을 다시 훑으면 의외로 기억이 잘 난다. 특히 책에 메모를 했을 때는 더더욱 잘 기억이 난다. 종이책은 무게가 있는 사물이기 때문에 디지털 활자와는 다르게 장소성을 가지고, 독자는 그 내용이 책 중간 어디에 있었는데, 하는 식으로 기억을 되살릴 수 있다.
두 번째로, 굳이 기억을 해야 하나? 내용이 궁금하면 다시 찾아 읽으면 된다. 영화를 보고 나서 어떤 장면 뒤에 어떤 장면이 이어지는지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해도 별로 슬퍼하지 않는 것처럼, 여행을 갔다오고 나서 그때의 공기와 풍경, 친구들과 보낸 시간을 흐릿하게 기억할 뿐 모든 여행의 장면장면을 줄세우지 않는 것처럼, 책 역시 어떤 문장 뒤에 어떤 문장이 오는지 기억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책을 읽을 당시에 즐거웠고 어떤 분위기였는지만 기억 나도 충분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 견해는 겨울서점 유튜브의 '책을 꼭 기억해야할까?'라는 영상에서 구체화되었음을 밝힌다). '정말 아름다운 이야기였어'라는 기분만 남아도 좋다.
마지막으로, 아주 일부라도 책은 내 마음안에 남는다. 희미한 목소리로 책은 마음에 남아 의외의 순간에 떠오르기도 한다. 나라는 비커에 책이라는 화학물질을 집어넣어 놓고 오래 묵혀두다보면 새로운 생각이 만들어질 수도 있다. 책을 읽고 있을 때 나중에 기억이 나지 않으면 어떡하지, 하며 초조해한다기보다 언젠가 도움이 되겠지 하면서 자연스럽게 읽어내려가길 바란다.
3) 재미없으면 던져버리기 (주의점 포함)
다른 콘텐츠들에 비해 책은 '끝까지 읽어야 한다'는 강박이 강한 편인 듯 하다. 영화를 보다가 재미없으면 영화관을 나오듯, 드라마를 보다가 재미없으면 하차하듯, 유튜브 영상 오프닝이 재미없으면 다음 영상으로 넘어가듯, 책 역시 읽다가 재미없으면 던져버려도 좋다. <에세이 만드는 법>의 저자이자 이야기장수 출판사 대표 이연실 편집자는 책의 20%까지 자신을 매혹하지 않는 책은 더 이어 읽지 않는다고 말한 적이 있다. (책읽아웃 - 김하나의 측면돌파 195회 참조). 읽어야 할 책이 산더미인데, 흥미롭지 않은 책을 붙들고 있을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다만 시작하는 독서가들에게 마냥 재미없으면 던져버리라고 섣불리 말하기 제안하기 조심스럽다. 편집자나 서점 MD는 책이라는 콘텐츠의 구성을 다각적으로 이해하는 전문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목차와 서문, 문장들의 면면을 보았을 때 이 책이 좋은지, 별로인지 빠르고 정확하게 판단해낼 수 있다.
완독의 경험은 귀중하다. 책읽기는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틀어놓고 스르르 잠들 수 있는 유튜브 영상과는 향유 경험이 아주 다르다. 그저 활자로만 되어있는 말들을 내 머릿속에서 구현하고 상상하고 이어나가는 작업들은 고되지만 끝마쳤을 때 다른 콘텐츠들이 줄 수 없는 성취감을 주곤 한다. 시작하는 독서가가 완독의 경험 없이 금방 하차해 다른 책으로 넘어가면 책읽기 경험 자체가 질적으로 더 나아가지 못할 수 있다.
일단 완독을 목표로 해보되, 중간에 책읽기를 중단할 수 있다는 선택지를 늘 염두해두자. 하차의 기준은 내가 정하면 된다. 내가 원할 때 시작할 수 있는 자유는 내가 원할 때 그만둘 수 있다는 자유를 함께 보장하니까. 핵심은 끝까지 읽어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괴로워하지 말자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