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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하연 Oct 27. 2022

4-2. 지루하고 지루하지 않은 책

4부 : 책을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 고민하는 독서가들에게

책읽기는 지루하고 재미없다는 오명(?)을 뒤집어 쓰고있다. 누군가는 그렇지 않다며 책을 위해 항변해주겠지만 (책아, 눈감아) 나는 솔직히 이 부정적 이미지가 어느 정도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책은 다른 콘텐츠에 비하면 지루하다. 재미없을 때도 많다. 콘텐츠 향유자들의 시간을 하이재킹해야 하는 관심경제에서 콘텐츠로서의 책은 약점이 뚜렷한 상품이다.


책의 첫 번째 약점은 저자극이다. 책은 다른 콘텐츠에 비해 시각적 자극이 적다. 영상물은 내 머릿속에 특정한 이미지를 떠오르게 도와주는 여러가지 장치들을 활용하는 반면 책은 그렇지 않다. 영화가 몰입을 돕도록 배경음악을 삽입하거나, 연극이 제4의 벽을 뚫고 관객과 접촉하는 등 청각, 촉각을 자극하지도 않는다. 들리는 건 종이가 넘어갈 때 사각이는 소리, 느껴지는 건 조금 까끌한 종이의 감촉 뿐이다.

자극이 덜하면 지루해질 수 밖에 없다. TV, 영화관, OTT, 유튜브, SNS 등 자극을 끊임없이 발생시키는 치밀한 전략과 기술력을 갖춘 컨텐츠들의 진입장벽은 책과는 비교할 수 없게 낮다. 자동차를 탈 수 있게 된 사람이 걷기를 이전만큼 선호하지 않는 것처럼, 자극이 강해질 수록, 편리함이 더해질 수록 덜한 자극, 불편함, 역체감을 견디기 힘들어진다. 유튜브 보기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에게  유튜브 볼 시간에 책을 읽으라는 말은 부산행 비행기표를 가지고 있는 나에게 부러 승용차를 타고 경부고속도로를 달리라고 강요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책의 두 번째 약점은 소요시간을 예측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상상해보자. 만약 유튜브 메인 화면에 떠 있는 영상들의 타임바가 전부 사라진다면 어떨까? 내가 보려고 하는 영상의 길이가 몇 분인지 미리 알 수 없다면, 영상을 클릭하더라도 타임바가 보이지 않으면 어떤 느낌일까. 사람들은 불쾌해지고, 영상을 클릭하는 데에 부담을 느낄 것이다. 향유자가 콘텐츠의 전체적인 분량을 가늠하고, 자신의 여가시간을 조절하는 행위는 컨텐츠 향유에서 가장 핵심적인 기능 중 하나이다. 나의 제한된 관심, 제한된 에너지, 제한된 시간 안에 나는 최대한 가성비 좋게 기쁨과 재미를 느껴야 한다.

타임바를 볼 수 없게 되면 컨텐츠 향유를 위한 전반적인 계획을 짤 수 없게 된다. 디지털 환경 속 콘텐츠들은  소요 시간이 어느정도임을 미리 예측하여 제시한다. 영화, 연극이 러닝타임을 표기할 수 있지만 책은 소요 시간을 미리 제시하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다. 페이지 수는 소요되는 시간을 정량적으로 판별하지 못한다. 똑같이 300쪽의 책이더라도 판형이 A5냐 B6냐에 따라 들어가는 활자 수가 현저히 달라진다. 내지의 글자 배치, 여백의 너비, 자간과 행간의 길이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동일한 사이즈의 동일한 디자인으로 만들어진 책이라 하더라도 독자에 따라 읽기 속도는 차이가 난다. 사람마다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는 어휘의 양이 다르고, 문장이 이 자리에 와야 하는 이유, 글의 전반적인 맥락을 추론하는 속도도 다 다르다. 서점에서 집어들은 책을 다 읽어내는 데에 1시간이 걸릴지 6시간이 걸릴지 한 달이 걸릴지 예상할 수 없다면 향유자는 그 책을 구입하는 데 상당한 부담을 느낄 수 있고, 읽기에 대한 동기 자체가 약해질 수 있다.


세 번째 약점은 튜토리얼의 부재다. 튜토리얼은 흔히 게임에서 사용되는 말로, 처음 게임을 접한 사람이 간소화된 모드로 자연스럽게 플레이어가 체험하게끔 해주면서 플레이 방법을 익힐 수 있게 도와주는 시스템이다. 튜토리얼을 통해서 게이머는 이 게임의 목적, 목적을 달성하는 방법, 내가 집중해야 할 플레이를 체득할 수 있다. 튜토리얼은 일종의 시식, 찍먹이다.

책은 찍먹이 어렵다. 유튜브 컨텐츠들은 본 내용을 짧게 하이라이트로 편집해 가장 앞에 삽입하여 영상을 클릭한 사람이 쉽게 빠져나가지 못하게 한다. 물론 책 중에서도 강렬한 제목, 인상적인 첫 문장을 가진 책이 있지만 모든 책이 그런 경향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책은 분량이 많기 때문에 전체 내용에 대한 요약이 몇 문장으로 만들어지기 어렵다. 향유자 입장에서는 리스크가 큰 셈이다. 책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는 어떤 재미, 감동을 얻을 수 있는지도 예상하기 어렵다. 무슨 음식이 맛있다 맛없다를 판단하려면 하나 집어 먹어보면 되고, 어떤 운동이 재밌다 별로다 판단하려면 체험해보면 되지만 책은 사전에 판단할 수 있는 부분이 상대적으로 제한적이다.  


출판편집자, 국어교사, 사서 등 책 관련 직업인들은 책의 디메리트를 보완하기 위해 여러 전략을 활용한다.

날로 수려해지는 북디자인이 좋은 예시다. 신경학자 올리버 색스의 대표 저서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의 2006년 출간되었을 당시 표지디자인을 보자.



함부로 평가하기 죄송스럽지만, 개인적으로 마음에 와닿는 디자인은 아니었다. 10년 뒤 2016년에 알마출판사가 다시 출간한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의 표지 디자인을 보자.



마그리트의 작품 속 등장하는 모자가 삽입되어 있다. 전반적으로 깔끔해진 인상을 주고, 마그리트의 초현실주의와 올리버 색스가 목격한 환자들의 기묘한 케이스들이 잘 어우러져 책에 대한 인상이 더 진중하고 궁금증을 유발시키게끔 바뀌었다.  

흰 종이, 검은 글씨가 주는 단조로움을 극복하기 위해, 독자가 미리 책의 내용과 분위기를 예측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책 표지는 책의 늬앙스와 구조를 잘 반영하는 방향으로 만들어지고, 많이 팔린 책들은 기념으로 리커버를 내서 잠잠해진 자극의 불씨를 되살리곤 한다.


시리즈물이 동일한 판형과 동일한 디자인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읽기 소요시간을 예측하게 하려는 전략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민음사의 인문잡지 <한편> 칼럼보다 길고 논문보다 짧은 학술비평을 담아내는데, 잡지는 동일한 포맷을 유지해야하기 때문에 글의 분량이 대부분 일정하다. 시리즈 기획과 이를 표상하는 디자인은 독자에게 분량을 예측할  있게 만드는 장치로서도 기능한다.

촘촘한 목차 구성도 소요시간 예측에 도움을 준다. 1부, 2부, 3부로 크게 나누어 사이사이에 다른 꼭지를 삽입해 독자가 숨돌릴 수 있는 휴게소를 마련하기도 하고, 일러스트 등을 활용해 읽기의 단조로움을 깨우는 리듬을 만들기도 한다.


출판사에서 제작하는 유튜브 영상, 편집자나 북튜버들의 책추천, 북 팟캐스트들의 꾸준한 방송 등은 아늑한 튜토리얼의 예시들이다. 미리 책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이나, 알아두면 재미있는 TMI를 소개함으로써 읽지 않아도 어느정도 내용을 가늠하게 해준다.

<어린이라는 세계>를 쓴 김소영 작가가 운영하는 독서교실 역시 책읽기로 재미있게 진입할 수 있게 도와주는 미끄럼틀이라고 볼 수 있다. 독서모임을 살롱문화로 만드는 스타트업 서비스 등도 튜토리얼의 역할을 한다. 책 관련 유튜브를 보면서, 독서모임에 참여하면서 내 독서 취향, 읽기 수준, 책을 이야기하는 방식 등을 차례차례 익힐 수 있다.


책은 지루하다. 다른 콘텐츠들의 시선에서 보면 그렇다. 다만 책이 영화의 재미, 게임의 재미, 유튜브의 재미를 따라잡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책은 책만의 속도가 있고 그 속도에서만 느낄 수 있는 재미가 있다. 척박하고 가혹한 콘텐츠 전쟁에서 책이 선두에 설 수는 없지만 넘어지지만 말고 달려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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