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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립 Oct 02. 2024

내가 쌍년이 된 이유

언제부터 담배를 피웠는지 한참 생각했다. 학교에서 잘생긴 외모 하나로 소문이 파다했던 그 선배가 나와 같은 희귀 성씨라는 것을 알았을 때 몹시 불쾌했다. 그 선배가 부디 내게 성씨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제대하고 돌아온 복학생 선배들을 환영하는 술자리에 나갔다. 아니나 다를까 과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우리를 엮어댔다. 머나먼 친척인 셈이라며 우리를 남매처럼 봤다. 이 빌어먹을 성씨로 낯선 이와 가족처럼 지내야 한다는 발상이 몹시도 한심했다. 그 선배는 내게 머쓱한 듯 술을 따라주었고 별 생각 없이 그것을 받아먹으며 취했다. 


그 선배는 학회장 선배의 공공연한 짝사랑 상대였다. 당시 학회장이었던 수연 선배는 갓 성인이 된 내 눈엔 참 멋지고 당찬 사람이었다. 고작 한 살 밖에 차이 나지 않은 언니가 뭐가 그리 대단해 보였던지. 수연 선배는 누군가를 짝사랑한다는 사실이 부끄럽지 않은 듯 보였다. 그 선배가 복학하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모습을 꽤나 여러 번 봤다. 수연 선배는 수석으로 입학했다는 신입생이 하이힐을 신고 진한 화장을 하고 다니는 것을 흥미로워 했고, 그래서 티가 나게 편애했다. 그 신입생이 나였다. 우리 과는 호칭에 굉장히 예민했는데, 절대 선배를 언니나 오빠라고 불러서는 안 됐다. 수연 선배는 나와 둘이서 술을 먹을 때면 꼭 언니라고 부르라고 당부했다. 수연 선배가 수연 언니가 될 때쯤, 그 선배가 복학한 것이다. 


나는 그때까지 초등학교 동창생과 연애하고 있었다. 그때부터 사귄 것은 아니고, 우연히 같은 대학에 들어온 것을 알게 된 후 급하게 사랑했다. 동창생이었던 진화는 타국 생활을 도가 지나치게 동경하고 있었고 입대 시기가 다가오자 카투사에 지원했다. 그가 영어를 하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은 없었으나 토익 점수에 대한 자부심은 종종 볼 수 있었다. 보기 좋게 카투사 입대에 실패한 그는 쫓기듯이 아무 부대에 입대했다. 고무신을 신고 있던 와중, 그 선배가 복학한 것이다. 


과 사람들끼리 모일 때면 그 선배는 어쭙잖게 내게 안부를 물으며 조언 따위를 해주려는 모습을 보였고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후배의 얼굴을 하고선 고분고분하게 대답했고 따라주는 술을 얌전하게 삼켰다. 하나둘씩 술에 취해 테이블에 엎드리거나 의자에 기대어 잠들고, 화장실로 뛰쳐가 구토를 하거나 아이스크림을 사러 간다며 짝지어 나가선 돌아오지 않았다. 내가 앉은 테이블엔 그 선배와 나만 남아 있었다. 


"수연이랑 친하다고 들었는데."


그 선배가 처음으로 싱겁지 않은 말을 던졌고 나는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그럼 나랑 가깝게 지내는 건 못하겠다. 그 선배의 말에서 계속해서 무슨 맛이 났다. 혀가 아리는 자극적인 맛이. 처음으로 그 선배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 봤다. 유행도 아닌 안경을 쓴 그 선배를 사람들이 대체 왜 잘생겼다고 그리 열광을 해대는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친척이잖아요, 선배랑 나는. 그게 내가 처음으로 그 선배에게 길게 말한 문장이었다. 그 선배는 뱉는 말과는 달리 싱겁게 웃었다. 그 웃음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지만 느낄 수는 있어 말 없이 소주를 들이켰다. 그 선배가 따라서 술을 먹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그 선배와 학교 운동장을 뱅글뱅글 돌고 있었다. 별 다른 대화는 하지 않았다. 그저 서로를 곁에 두고 앞에 놓인 길만 쳐다보며 걸었다. 


"좋아할까요?"


내가 대뜸 물었다. 그 선배가 우뚝 멈춰 섰다. 나를 내려다 보는 눈길이 어딘가 슬펐다. 고개를 가로젓는 그 선배에게 문득 오기가 생겨 잘 하지 않는 질문을 하기로 했다.


"선배 스타일 아니죠? 수연 선배요."


높은 계단에 당도한 우리는 앉지도 않은 채 어설프게 서 있던 찰나였고, 나는 한 계단 위로 올라서며 물었다. 그 선배가 입꼬리를 비틀며 웃었다. 그 선배를 위에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안경 뒤로 숨어있던 얼굴이 언뜻 보였다. 많이 취해 있었던 걸까. 나는 그때 결심했다. 


"좋아할게요."


그 선배는 나를 올려다 보더니 대뜸 내 허리에 한쪽 팔을 둘렀다. 내가 다른 쪽 팔을 끌어 내 허리에 마저 둘렀다. 이 여자 저 여자 갈아타며 소위 얼굴값 한다는 소문에 시달리다 입대했던 복학생과 하이힐에 진한 화장을 즐기는 신입생이 학교를 재밌게 해주던 첫 순간이었다. 나는 그 선배에게 담배를 배웠다. 무언가를 시작하는 것이 무섭다며 우는 내게 아무거나 일단 해보라며 입에 물려준 것이 그 선배가 피우던 담배였다. 그렇게 담배를 피우게 됐다. 


그렇게 사랑을 잘못 배웠다. 

앞으로 할 이야기는 이렇게 사랑하면 안 된다고 알려주는 지침서 같은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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