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립 Oct 04. 2024

빨간 하이힐이 왜?

그 선배는 집안 형편이 어려워 등록금이 저렴한 학교와 안정적인 직업을 가질 수 있는 학과를 고심 끝에 선택한 케이스였고, 나 같은 경우엔 집과 가까운 4년제 대학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생각 없이 입학한 케이스였다. 남들에겐 말하기도 쪽팔린 예술에 대한 열망이 가득해 예술대학만을 좇다가 현실의 벽에 부딪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지원한 학교에 덜컥 수석으로 입학하게 됐고, 나는 더욱 이 학교가 싫어졌다. 중고등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한 내가 중등교사 양성을 위한 사범대학에서 공부한다는 것 자체가 짜증이 났다.


그 선배는 끊임없이 아르바이트를 했다. 피자헛에서 서빙을 했던 그 선배는 그 잘난 외모 탓에 유명해져 여고생들은 물론 여대생들에게서 매출을 쉽게 뽑아먹었고 매장에서는 그것을 썩 흡족해했다. 나는 끊임없이 쇼핑을 하고 술이나 퍼먹었다. 이따금 세진과 그녀의 남자친구를 데리고 그 선배가 일하는 피자헛에 데려가 밥을 사줬다. 그 선배가 일하는 곳은 번화가에 위치해 있어 거리를 걷고 있노라면 흔히들 말하는 폰팔이들이 붙잡고 액정 보호필름을 갈아주겠다느니 하는 수작질을 해대는 것이 다반사였다. 한 번은 그 노련한 폰팔이에게 붙들려 매장에 들어간 적이 있었다. 들어간 김에 새로 출시된 아이폰으로 바꿔버렸다. 그냥 색깔이 예뻐서였다.


그 후 그 폰팔이는 시도 때도 없이 내게 전화를 걸어대 매장에 놀러 오라고 했다. 때 마침 시험기간이라 나는 그 연락이 굉장히 귀찮았다. 학교 축제로 시끄러울 때, 그 폰팔이는 기어코 학과 부스로 찾아와선 매상을 올려주겠다며 다 먹지도 못할 안주와 술을 시켰고, 우리 과에서 야심 차게 준비했던 물건들을 모조리 구매했다. 그게 나를 빼가는 값이라며 나를 데리고 외곽의 술집으로 향했다. 처음 보는 술병들이 즐비했고 나는 그것을 하나하나 맛보는 재미로 앉아 있었다. 그 폰팔이는 내게 연애 비슷한 것을 해보고 싶다 했고 나는 남자친구가 있다는 대답을 했다. 폰팔이는 본인은 와이프가 있으니 서로 동등한 관계가 아니냐며 웃었고 나는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위스키 병들을 바닥으로 쓸어버렸다. 깨지면서 튄 유리 파편이 다리 여기저기에 박혔다.


"너 그거 범죄야, 개새끼야."

"이럴 거 알고 온 거 아냐? 하고 다니는 꼬라지를 보니 걸레 같구만."

"걸레도 닦고 싶은 바닥이 따로 있어."


내가 가방을 챙겨 나가려 하자 폰팔이는 내 가방을 낚아챘고 그 안에 있던 것들이 와르르 쏟아졌다. 화장품과 향수, 그리고 콘돔이. 폰팔이는 콘돔을 들고선 내 눈앞에 흔들며 이게 뭐냐 물었다. 그 콘돔은 올바른 성생활을 응원한다며 학교에서 성 관련 캠페인을 벌일 때 같잖은 '생명은 소중하다'는 스티커를 붙이며 나눠준 것이었다. 그 사건이 있은 뒤부터 나는 외출하고 나선 꼬박꼬박 가방 정리를 하는 강박이 생겼다. 집으로 돌아오는 택시비로 상당한 지출을 해 한동안 술을 먹지 못한 것이 꽤나 억울했다.


축제가 마무리되고 나서 내 평판은 더욱 나빠졌다. 진화를 만나기 전 나는 가짜 휘발유를 팔며 수작질이나 하던 삼류 깡패와 첫 연애를 했었는데, 광적인 집착으로 신입생 OT와 학과 MT를 모두 쫓아다녔다. 조금이라도 답장이 늦어지면 곧장 학과 사람들이 모두 모인 자리로 들어와 뒤엎곤 했다. 위치 추적을 당하며 통화목록을 검열당하고 나의 페이스북 계정이 그 깡패 휴대폰에 동시 로그인이 된 채로 1년이 채 안 된 시간 동안 시달리며 지치고 질려 신입생으로 맞은 여름에 이별을 선언했다. 깡패와 사귀는 여자애에다 힐을 신고 짧은 치마만 입고 다녔으니 이미지가 좋았을 리가 없다. 그런 와중에 양팔에 문신을 잔뜩 한 그 망할 폰팔이가 축제에서 골든벨을 울렸으니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는 뻔한 거였다.


그 선배는 아르바이트 핑계로 축제에 전혀 참여하지 못했고, 이 사건을 뒤늦게야 들었다. 내게 별 다른 것을 묻지 않아 화가 났다. 설명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아서였다. 그 선배도 학과 사람들과 똑같이 나를 오해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경멸의 시선도 보내지 않고 평소처럼 나를 대해 더 울컥했다. 단지 내가 설명할 수 없어서였다. 나는 출처를 알 수 없는 정의와 진실에 목을 매며 살던 사람이었으므로 억울한 사실을 풀어낼 길이 없다는 그 현실 하나에 화가 났다. 그 빌어먹을 정의와 진실 또한 예술적이라 생각했다. 나는 씨발 예술이 너무도 싫어서 꼭 해내고 싶었다.


언제나 세상에게서 외면받는 것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내가 그것을 다 겪어봤으니까. 가치가 있어야만 했다. 그 해 마지막 기말고사가 다가올 무렵 세진은 제 눈에 너무나 잘생겨 집착할 수밖에 없었다던 생애 첫 남자친구와 헤어졌다. 인형 같이 예쁘장한 신입생과 바람이 났다나 뭐라나. 그 후 세진은 나를 더 적극적으로 불러내 술을 먹었다. 어느 날엔 그 선배가 성적이 미달돼 기숙사를 들어갈 수 없어 원룸을 구했다며 내게 보여줬다. 나는 그렇게 좁은 공간에서 사람이 살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지하에 위치했던 그 선배의 집은 여기서 어떻게 사람이 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열악했다. 나는 이런 곳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도, 기숙사에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성적을 받지 못했다는 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이해할 수 없는 곳에서 밤을 지새우며 처음으로 동 틀 무렵 몸을 섞었다. 꽤 오랫동안 만남을 지속했으나 그게 그 선배와의 첫 잠자리였다. 도대체 남자와 여자는 왜 섹스를 하는가에 대해 심각하게 고찰했다. 이딴 걸 도대체 왜.


수연 선배가 나와 그 선배의 사이를 알고 나서부턴 일절 내게 술을 먹자는 연락을 하지 않았다. 당연한 수순이라 생각했다. 아쉬웠다. 나는 남자와의 관계보다 여자와의 관계에 더 목말라했다. 그게 못 견디게 슬펐다. 우리는 근친상간이라는 수식어를 단 커플이 되어 있었고, 대충 눈에 띄는 술집에 들어가 대충 술을 먹으며 그 사실에 대해 조소했다. 본관이 같으면 근친상간인가. 우리는 그것에 대해 웃고 떠들었다.


나는 학교에서는 물론 학교에 면접을 왔던 수험생들 덕분에 입시 카페로 유명했던 곳에서도 빨간 하이힐로 불렸다. 그즈음 나는 빨간 크리스찬 루부탱 하이힐에 꽂혀 있었고, 그것을 신고 면접 도우미로 일했으므로 그게 당연하기도 했다. 작은 키가 콤플렉스였던 나는 10센티가 넘지 않은 신발은 신발이라 취급하지 않으며 대학생활을 했으므로 나의 그 걸레 이미지에 내가 일조했다고 인정할 수 있다. 빨간 하이힐은 예쁜 미소를 흘리며 친절히 인간들을 대했고, 그 친절은 또 헤픈 이미지를 끌고 왔다.


빨간 하이힐은 당시 유행했던 과팅에서 가장 인기 있는 인물이었는데, 평소엔 말도 안 붙이던 동기들이 잘생긴 남학생이 많다고 소문난 학과와 과팅을 성사시킬 때면 늘 나를 불렀다. 나는 정말 앞뒤가 똑같고 지조 있는 여성인지라 술이 있는 자리는 마다하지 않는 성격에 못 이겨 술을 먹을 목적으로 딱 한 번 나갔었다. 그곳에서 남초 학과로 유명했던 기계공학과와 술을 먹었다. 나는 키가 큰 남성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었고 그중 가장 키가 큰 남성과 눈이 맞아 따로 나와 단 둘이 술을 먹었다. 술. 나는 왜 이렇게 술이 좋은지 재미있는 술자리라면 마다할 수가 없었다.


정신 차려 보니 학교에서 가장 가까운 모텔에 그 키 큰 공대생과 엎드려 있었다. 옷은 입은 채로. 그 공대생은 내게 여자친구가 있다는 말을 했다. 그런 것은 상관없으니 술이나 먹자고 대답했다. 그럼 왜 이곳으로 왔냐고 따지듯이 묻기에 나도 따지듯이 술 먹자고 이곳으로 데리고 온 건 너였다고 답했다.


"남자들이 이렇게 하는 이유를 진짜 몰라서 그러냐?"

"내가 그걸 왜 알아야 하는진 모르겠고 약속한 술이나 먹어요."


그 공대생은 어이없다는 듯 티셔츠를 벗었다. 옆구리에 무엇인지도 가늠할 수 없는 문신이 있었다. 내가 깔깔대고 웃으며 그런 문신은 대체 왜 하냐고 물었다. 멋이라고 답했다. 좆같으니 이리 와서 술이나 먹으라고 했다. 공대생은 내게 술을 따라주고 본인도 입에 한 잔 털어 넣더니 내가 좋다고 말했다. 나는 그럼 그 여자친구와 나를 동시에 만나 술을 먹으라 했다. 그건 안 될 것 같으니 여자친구를 정리하고 내게 오겠다 했다.


"난 섹스가 싫어."


내가 대뜸 말했다. 공대생은 눈이 동그래진 채로 나를 쳐다봤다.


"미안한데 그 좆같은 섹스는 여자친구랑 해요. 그러라고 연애란 게 있는 거야."


나는 테이블 위에 있는 모든 술을 마시곤 모텔을 빠져나와 그 선배에게 전화했다. 자취방으로 오라고 짧게 말했다. 나는 그 선배의 자취방에 들어서자마자 토하듯이 말을 했다. 내가 다른 남자랑 모텔에 있다 왔다니까? 그 선배는 내 옷가지며 가방을 정리하며 그 좁디좁은 방 안에 나를 앉혔다.


"너 사랑해 본 적 없지?"


내가 아무 말도 않고 그 선배를 올려다봤다. 안경을 쓰지 않은 맨얼굴을 처음 봤다.


"하잖아. 선배랑."


내가 말하자 그 선배는 마른세수를 했다.


"사람들이 왜 너를 욕하는지 알아?"

"내가 그걸 왜 알아야 하는데?"

"아쉬울 게 없는 것처럼 굴거든."

"책임져 줄 것처럼 말하지 마요."


그 선배와 처음으로 말다툼을 한 날이었다.

선배는 아무 말도 않고 내게 따뜻한 코코아를 먹였고 나는 그것을 다 먹은 뒤 얌전히 씻고 좁은 이부자리에서 잠을 청했다. 선배가 알바 대타를 뛰러 간다는 메시지를 남기곤 홀연히 집을 나선 뒤에 눈을 떴다. 너무도 명확히 알고 있었다. 겉모습만 쳐다보고 떠다니는 소문만 듣고선 나를 판단하는 목소리들을. 목소리는 곧 나의 질병이 됐다.


환청의 시작이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