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립 Oct 03. 2024

사랑해서 견딜 수 없는 구타

애석하게도 나는 이별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고,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잠깐 암전됐다 장면이 전환되면 모든 것이 끝나있었기에 이별은 그렇게 하는 것인 줄 알았다. 잠깐 눈 감았다 뜨면 서로의 시간과 몸을 섞는 사이에서 서로의 시선이 맞닿는 일은 없어야 하는 사이가 될 줄 알았다. 당시 나의 연애는 갓 퍼지기 시작한 스마트폰에서 시작돼 끝이 났다. 그러나 진화와는 스마트폰으로 이별할 수 없었고 나는 하는 수 없이 그가 휴가를 나오길 기다렸다. 그 선배와 사귀기로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꽤나 고지식한 면이 있어 한꺼번에 두 관계를 갖는 것은 죄악이라 생각했다. 나를 모르는 사람들은 깨끗한 척을 한다며 굉장히 재수 없어했다.


나와 그 선배는 이따금 학교 사람들이 가장 기피하는 술집에서 만났다. 그때쯤 학교 근처에 원룸을 얻었다. 신입생 시절부터 기숙사에서 살던 나는 해가 바뀌고 새로 배정받은 룸메이트를 상당히 참고 있었다. 내 머리띠나 귀걸이 따위를 훔쳐 쓰곤 얌전히 제자리가 갖다 놓는 것을 일찌감치 눈치채고 있었으나 나는 기숙사 점호시간에 겨우 들어와 씻고 잠을 청하고 아침 일찍 나가는 탓에 그 룸메이트와 마주칠 일이 없어 말할 기회를 잡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룸메이트가 선을 넘어버렸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내게는 미제 학용품이나 당시 한국엔 들어오지 않던 중고가 브랜드의 잡화들을 사다 주던, 일명 하와이 이모할머니가 있었는데, 내가 유독 아꼈던 것은 안나수이 거울이었다. 그 거울을 끝으로 이모할머니가 잠적했기 때문이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몰라 유품이라 부를 수도 없는 그 거울이 깨진 채로 책상 위에 놓여져 있었고 옆엔 포스트잇 하나가 붙어 있었다. 언니 죄송해요. 너무 예뻐서 그만.


그날 그 룸메이트는 외박을 했고 나는 다음날 짐을 쌌다. 룸메이트 책상에 놓여있던 것들을 모두 쓰레기통에 처박아 둔 채로. 그래도 마음 약한 구석이 있어 친히 쓰레기통을 새로 샀다. 사면서도 이런 내가 웃겼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기숙사에서 더 살다가는 창문으로 뛰어내릴 것 같다고 말했고, 엄마는 곧장 학교에서 제일 가까운 원룸을 얻어주었다. 아주 넓고, 그만큼 베란다도 넓은 곳으로. 세탁기를 사용하는 법과 화장실은 저절로 깨끗해지는 공간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때쯤, 진화가 휴가를 나왔다.


진화는 놀랄 만큼 바뀌어 있었다. 입대할 때보다 어깨가 두 배는 커져 있었다. 솔직히 눈이 반짝였던 것은 사실이다. 그날 진화의 벗은 등을 한참 쳐다봤다. 타인의 나체를 진지하게 바라본 적이 있던가. 나는 그 등을 보며 생각했다. "자취한다더니 전화도 잘 안 받고." 진화는 내가 아니면 안 될 것 같이 굴었고, 나는 그게 퍽 짜증이 났다. 우리가 무슨 희대의 사랑을 했다고. 피차 외로워서 만난 주제에. 그 선배 때문에 급한 사랑에 환멸을 느낀 게 아니라 입대 전부터 자꾸만 기대어 오는 그가 싫증이 났다. 갈수록 카드값이 는다는 엄마의 잔소리도 여러 번 들었고, 그는 곧 입대하는 자신에게 취해선 그게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입대 후엔 편지나 택배 같은 것들을 당연히 받아야 하는 줄 알았다. 그런 것을 쓰고 보내기엔 나는 술을 먹고 해가 뜨는 것을 보며 귀가하는 것이 너무도 즐거웠다. 내 카드는 내 술값으로 긁힐 때 가장 예뻤고, 잔소리도 듣기 좋았다.


"앞으로는 안 받을 거니까 이제 하지 마." 나는 씻으러 들어가며 툭 내뱉었다. 그의 대답이 듣기 싫어 빠르게 샤워기를 틀었다. 씻으러 들어갈 때 옷가지를 챙기고 다 입고 나오는 내 습관을 처음으로 칭찬했다. 씻고 나왔을 땐 그가 청바지만 입은 채로 TV 선반에 기대어 서 있었다. 마음 약해지게. 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더 마음이 약해졌다. 나는 연민이 많다는 단점이 있다. 휴가를 나올 때만 만나달라 했다. 술 없이 취한 내가 알겠다고 했다. 그날 우리는 여러 번의 밤을 보냈다. 그러는 동안 그 선배의 메시지가 휴대폰에 여러 개 쌓였다.


겨울에 입대했던 그가 어느 봄과 여름 사이에 또다시 휴가를 나왔을 때 처음으로 내 원룸에 들어왔다. 딱히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었고 나의 유치한 이불을 보고 싶다고 했다. 나는 당시 꽤나 유아적인 캐릭터에 빠져 있었는데 시중에 출시된 거의 모든 제품을 사들였다. 그땐 그걸 내가 사랑했다. 그는 나의 작고 아기자기한 이불을 보며 웃음을 터뜨리는 대신 혀를 섞었고 나는 처음으로 남자에게 맞았다. 사랑해서 견딜 수 없다는 듯한 구타였다. 우습게도 따가운 뺨에서 그와의 밤이 기억됐다. 썩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어느 틈엔가는 무지막지하게 매운맛으로 마케팅을 펼친 볶음라면이 전국에 유행했다. 그 우스운 트렌드에 민감했던 젊은 피들은 눈에 불을 켜고 그것을 사들였다. 나는 통각이 없나 싶을 정도로 매운맛을 느끼지 못하며 살았고, 그 라면을 다 먹는 도전이 유행하면서 다들 내게 먹어보라는 권유를 심심찮게 했다. 그 선배가 대뜸 그것을 물어왔다. 너 그거 다 먹을 수 있어? 그게 제법 귀여워 그렇다고 대답했다. 보여달라는 말에 또 술에 취해 알겠다고 했고, 그 선배는 그때 볶음라면을 다 먹어치우는 내가 보고 싶어서 내 원룸에 들어왔다. 그날, 라면은 두 입을 더 먹지 못했다. 나도 매운 것이 있었다. 자꾸만 각인되는 그 선배의 입꼬리가 나는 그렇게 매울 수가 없었다. 그때부터 그 입 안에 있는 것도 매운지 확인해 봐야겠단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나는 밤이 되면 형광등을 켜지 못하는 몹쓸 정신병에 걸려 있었고, 그날도 적당한 값에 주고 산 무드등 하나를 켜둔 채 그 선배와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때 누군가 현관문 비밀번호를 치는 소리가 들렸고, 종종 그랬듯 술 취한 누군가의 실수라 생각했지만 나의 현관문은 너무나 무력하게 열렸다. 낯선 남성이 들어오려다 나와 그 선배를 보고 놀라 멈춰 섰고, 이내 빠르게 도망쳤다. 그 선배는 곧장 그 남자를 쫓아갔고, 알고 보니 그는 오랫동안 나를 스토킹한 옆집 남자였다.


나는 술이 너무 좋아 집에 도통 들어갈 생각을 않았고, 그즈음 전혀 관련 없던 타과생 여자애랑 친해져 매일 해 뜰 때까지 술을 퍼먹고 겨우 집에 들어가 샤워하고 화장을 다시 하곤 1교시 강의를 아무렇지도 않은 척 들어가는 일을 반복했다. 공대생이었던 세진은 잘생긴 남자가 미래라고 외치고 다녀 같은 과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던 귀여운 애였고, 나는 그저 술 먹을 사람이 필요한 외로운 애였기 때문에 서로 죽이 잘 맞아 매일 같이 만나 지나가는 남자에 대해 품평하는 것을 취미로 삼았다. 세진과 술을 퍼먹느라 공과금은 오를 기회가 없었고 자꾸만 금액이 줄어드는 고지서엔 한날 빨간 글씨로 뭐라 쓰인 포스트잇이 붙여져 있었다. 남자친구 생겼나 봐요, 집에 잘 안 들어오시네. 그게 옆집 남자였을 줄이야.


안일한 태도로 일관하는 원룸 주인에게 화가 난 그 선배는 나를 옆에 두고 살펴야겠다고 선언했다. 우리 사이가 창피해서 되겠느냔 나의 자조적인 질문에 내가 없으면 학교 다닐 이유가 없으니 차라리 창피한 게 낫다고 대답했다. 그날 우리는 처음으로 학교에서 제일 인기가 좋은 술집에서 값싼 위스키를 마셨다. 그리고 하얗고 마른 그 선배의 등을 봤다. 까맣고 넓었던 그 등은 이미 지난 인연이 된 지 오래였다. 진화는 정말로 휴가 때만 나를 만났고, 제대하고 나선 호주로 어학연수를 떠났다.


마지막 휴가 때 진화는 한 번 더 울었다. 자신에게 원하는 게 있냐고 묻기에 폭력적인 모습을 보고 싶다고 대답했다. 그날 나는 뺨을 세게 맞으면 귓가에서 삐- 소리가 난다는 것을 알았다. 그게 꼭 앞으로를 예견하는 경고음 같았다.


내게는 특별한 능력이 하나 있다. 내가 예상한 불행은 반드시 옳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