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갖 물감을 발바닥에 묻힌 채로 걷고 걸었다. 미끌거리는 감촉에 넘어질 법도 했지만 잘도 균형을 잡으며 꼿꼿이 움직였다. 걸어온 길 위로 찍힌 발자국이 진했다가 희미해지기를 반복했다.
어느새 검은색 물감이 땅에서 발바닥을 타고, 다리를 타고 올라온다. 스멀스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아주 적당한 속도로 그를 집어삼킨다. 그는 더 이상 걷기를 멈추고 가만히 기다린다. 토해버릴 것 같은 구토감을 가까스로 억제하며 이 까만 물감이 빨리 자신을 집어삼키기를 기다린다. 이윽고 머리끝까지 잠식당하고서야 역함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