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한가로운 주말 점심이었다. 몽글몽글한 구름 사이로 뜨거운 햇살이 거실 창을 비추고 있었고, 아이는 매트 위에서 뒹구르며 장난감 자동차를 가지고 놀고 있다. 집안일을 하고 잠깐 소파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나는 얼음이 찰랑찰랑한 아이스커피를 가져와 소파 옆에 두었다. 소파에 나뒹구는 리모컨을 손에 쥐고 TV를 켜서 채널을 돌려보며 무엇을 볼지 고르고 있었다.
지잉- 하고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밖에서 일하고 있는 남편에게서 온 문자메시지였다. 메시지가 온 것을 보고 나는 내 머리 위에 있는 육아용 홈캠을 바라봤다. 그는 아마도 내가 거실에서 무엇을 하는지 이미 보고 메시지를 보낸 것이 분명했다. 대개는 그러했으니까.
"○○프로그램 안 봐? 나 오늘 나오는데."
남편은 이따금씩 종종 TV 프로그램에 출연하고는 했다. 그럴 때마다 살뜰하게 챙겨보려고 했는데, 하필이면 내가 그다지 즐겨보는 프로그램이 아니어서 놓치기 일쑤였다. 심지어 나는 매번 남편이 일러주는데도 프로그램이 나오는 요일과 시간을 늘 까먹었다. 몇 번씩이나 물어봐도 도무지 기억을 하지 못했다.
"앗 이런, 오늘 나오는 날이야? 또 놓쳤다!"
오른손으로 핸드폰 메시지를 보내면서 왼손으로 서둘러 채널을 돌렸다. 그나마 다행히도 채널 번호는 기억해 냈다. 하지만 그 프로그램은 이미 끝나버렸고, 나는 아쉬움에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머쓱해하는 사이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당신이 절대 못 외우는 것 중 하나지. 내가 아기 연고랑 로션을 모르는 것처럼. 그렇지만 나는 존중할게"
핸드폰 메시지를 본 순간 나는 푸하핫- 하고 소리 내서 웃었다. 이런 순간에 존중이라는 말을 하다니!
남편은 아기 외출 준비를 할 때마다, 또는 목욕을 시킬 때마다 항상 내게 묻고는 했다.
"아기 얼굴에 뭐 발라야 하지?"
"아기 엉덩이에는 뭘 발라?"
남편은 육아를 매우 잘하는 편이다. 어떤 점에서는 나보다도 훨씬 나은 편이라 나는 그가 타고난 육아 체질이라고 생각한 적도 많았다. 그런 그가 벌써 햇수로 2년 차 아빠인데도 불구하고 때때마다 나에게 아기 화장품을 물어봤다. 그래봤자 종류가 많지도 않음에도 말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대체 언제까지 물어볼라나 이젠 외울 법도 할 텐데."
라며 핀잔을 줬던 것이 생각이 났다. 갑자기 부끄러운 마음에 미안하면서도 웃음이 났다.
나는 유년 시절의 결핍으로 인해 내게 '존중'이라는 단어가 몹시 생소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성인이 되어서야 '존중'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고, 이를 적재적소에 적용시키려 지금까지도 무단히 노력 중이었다. 그래서 '존중'이라는 단어가 주는 묵직한 무게감에 기가 눌려, 꼭 진지한 상황에서만 써야 한다고 여겨왔다. 그런데 이런 사소한 일상 속에서의 '존중'이라니! 한없이 가벼우면서도 다정하고 살갑게 느껴졌다.
나는 기분이 좋아져서 흐뭇한 미소로 남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나 참 결혼 잘한 것 같아."
갑작스러운 고백에 당황했을 남편의 귀여운 표정을 상상하자 마음이 따뜻해졌다. 이럴 때마다 남편은 굳은 얼굴로 미간을 약간 찡그리며 낯부끄러워하는데, 속 모르는 사람이라면 기분이 상한 것처럼 딱 오해하기 쉬운 표정이다. 하지만 그의 서툰 표정 속에는 부끄럼이 많은 어리숙한 소년이 잠자코 숨어있었다. 그 소년은 좋아하는 소녀에게 고백을 하기는커녕 머리를 잡아당기며 괴롭히기만 하지만, 그럼에도 말갛게 빛이 나는 눈빛으로 소녀를 바라보는 어리숙한 소년이었다.
기억을 거슬러서 우리가 처음 데이트를 했을 때, 내가 그를 무척 당황하게 만든 일이 있었다. 저녁 무렵, 그의 차를 타고 설레면서도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이태원으로 향했다. 도시의 건물 사이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 가을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리고 있었다. 해가 짧아져서 땅거미가 진 어둑어둑한 길거리를 다닥다닥 붙어있는 상점들의 조명 불빛이 밝혀주고 있었다.
그와 나는 팔만 서로 스칠 정도의 거리로 가깝게 붙어서 걷고 있었다. 어색함에 말없이 걷고 있는데, 우리의 팔이 스치고 곧바로 손날이 스쳤다. 그 순간 나의 심장이 푸딩처럼 말캉말캉하면서 출렁대고, 설렘과 함께 잦은 떨림이 온몸을 감쌌다. 에잇 모르겠다! 나는 충동적으로 그의 팔을 내 손으로 감아서 팔짱을 끼었다.
"어?"
그가 나의 행동에 당황한 탓에 놀란 반응을 보였다.
나는 부끄러움에 그의 눈을 쳐다보지 못하고 수줍게 말했다.
"왜요? 안 돼요?"
그도 내 눈을 쳐다보지 못하고 굳은 얼굴로 앞만 보고 말했다.
"아니 너무 좋아서."
그의 반응을 살피려 힐끔거리며 표정을 살펴보았다. 분명 또렷하게 너무 좋다고 말한 그의 진심과는 달리 단호한 목소리와 굳은 표정이 정확하게 언행 불일치를 보여주었다. 나는 그 모습이 귀여워서 작게 실소하며 그의 팔을 두 손으로 안고 길을 걸어갔다.
그때의 말갛게 빛이 나는 눈빛을 가진 그 어리숙한 소년은 아직도 그의 가슴 안에 남아 있어 나를 이따금씩 설레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