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적인 장녀 사회생활
1980년대에 태어난 장녀로서, 나는 이전 세대와는 달리 대학에 가는 것이 더 이상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여전히 대학 진학은 선택사항에 불과했다. 나는 대학을 선택했지만, 경제적인 이유로 취업의 끈을 놓을 수 없었기에 야간대학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입학했지만, 야간대학의 특성상 번듯한 직장생활을 할 수 없었고, 결국 아르바이트를 이어가야만 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이어온 나레이터 아르바이트는 그때까지의 나에게 큰 힘이 되어주었다. 주말에만 하던 일을 평일로 확장할 수 있었기에 짧은 시간에 전문대학교 등록금을 모을 수 있었다. 그러나 야간대학 출석과 시간을 맞추기가 점점 어려워졌고, 고정적인 수입이 아니었던 나레이터 일을 결국 그만두게 되었다.
그 다음으로 선택한 일은 옷가게 아르바이트였다. 야간대학에 다니면서 매일 아침 일찍 대형 쇼핑몰로 출근해 매장 정리, 옷 정리, 그리고 판매까지, 손님을 대하는 모든 일을 경험했다. 그 당시, 대형 쇼핑몰은 온라인 쇼핑몰이 많지 않았던 시대라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매일 같이 서울 도매 시장에서 배송된 물건들을 마대로 내리고, 옷을 정리하며, 옷 단가를 정하는 법 등을 배웠다. 매장에서 일하는 언니들과 이모들 사이에서 일하며 나는 옷의 센스뿐만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읽는 법도 배웠다. 어떤 손님이 어떤 옷을 원하는지, 그에 맞는 대화를 어떻게 이끌어가야 하는지에 대한 감각이 자연스럽게 몸에 익었다.
매장은 항상 북적거렸다. 주말이 되면 좁은 매장 골목마다 사람들로 가득 차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손님이 많거나 일이 많아지면, 가끔 야간대학 수업에 늦거나 피곤해 출석을 못하는 일도 잦아졌다. 졸업은 했지만, 성적은 그리 좋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 나는 공부에 큰 관심이 없었다. 옷가게는 주말에도 쉬지 않았고, 나 역시 쉴 틈 없이 일해야 했다. 당시는 그 일이 힘들게 느껴지지 않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참으로 고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달 월급을 받고, 내 스스로 일할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매장에서 일하는 언니들과의 수다는 일상의 작은 즐거움이었다. 나와 같은 나이대의 친구들은 없었지만, 나는 나이 든 이모들이나 언니들과 수다를 떠는 것이 오히려 편하고 즐거웠다.
대학을 졸업한 후에도 나는 콜센터에서 일을 이어갔다.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그곳에서도 큰 어려움 없이 적응할 수 있었다. 20대의 나는 쉬지 않고 달렸다. 가정 환경상 쉴 수 없는 상황이기도 했지만, 나는 그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번 월급의 상당 부분을 꼬박꼬박 엄마에게 가져다 드렸다. 부모님은 그걸 바라지 않으셨지만, 사양하지도 않으셨다. 나는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었고, 그것이 내가 일을 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그때마다 나는 마음 한편에 묵직한 책임감을 느꼈다. 장녀로서 내가 해야 할 일이었고, 부모님께 보탬이 되어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었다. 월급날이면 돈을 손에 쥐고 부모님께 드릴 때, 내 어깨에는 장녀로서의 무게가 더해졌다. 부모님의 눈에는 자랑스러워 보였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 순간마다 내 20대가 이렇게 흘러가고 있음을 깨닫고 있었다.부산의 큰 쇼핑몰에서, 아침 출근 후 학교에 가기 전까지 알바를 하며 사람들과 마주쳤던 시간들, 그리고 콜센터에서 쌓아온 사회생활의 경험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 시간들 속에서 나는 나의 청춘을 다 소진한 것 같아 후회가 남기도 한다. 내 20대가 가정의 보탬이 되면서도, 나 자신에게는 무엇을 남겼는지 돌아보게 된다.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쉼 없이 달려온 내 사회생활, 그 과정에서 느꼈던 감정과 경험들은 지금의 나를 단단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 시간이 내 인생에서 얼마나 큰 무게였는지를 떠올릴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저릿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