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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바람 Oct 04. 2022

#4 뜻밖의 가족 여행

제주에 혼자 조용히 갔다 오려고 했다. 하지만 엄마가 따라나서겠다고 했다. 딸이 원룸 사기를 당할까 봐 걱정된다는 게 이유였는데, 내가 보기엔 여행이 가고 싶은 것 같았다. 이 소식은 오빠네 가족에게 전해졌고, 오빠네도 같이 가겠다고 했다. 너무 자연스러운 전개라 당황스러웠지만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가족 여행의 장점도 있었다. 사람이 많으면 수하물 무게가 늘어나서 내 짐을 택배로 부치지 않고 옮길 수 있었다.


20개월 된 조카와 60대 엄마의 기호에 맞는 여행 일정을 짜야했다. 엄마는 나보고 알아서 하라고 했고, 오빠는 새언니와 상의하라고 했다. 새언니는 조카가 좋아할 만한 장소가 좋겠다고 했다. 그리고 조카는 의사 표현을 할 줄 모르는 20개월 유아다. 돌고 돌아 결정권이 나한테 왔다. 독서를 통해 얻은 꿀팁과 인터넷 검색 결과를 조합하여 최적의 동선을 짰다. 비행기표는 갈 때는 5장, 올 때는 4장을 예매했다. 나는 제주에 남게 될 것이므로.


여행 첫날, 잠을 설쳤는데도 아침 6시에 눈이 떠졌다. 몇 달 전부터 기다리던 날이라 가슴이 두근거렸다. 설레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먼지가 쌓일 내 방을 깨끗하게 정리했다. 작고 소중한 짐을 챙겨서 차에 차곡차곡 실었다. 꼭 필요한 물건만 골라 담았는데도 부피가 제법 있었다. 떠나기 전에 방을 힐끗 바라보았다. 내 방의 아늑함이 그리워질 때쯤 돌아오게 될 것이다.


점심때 제주에 도착했다. 어른 키만 한 흑돼지 꼬치 요리로 제주에서의 먹방을 시작했다. 멜젓을 찍어 먹으니 제주의 맛과 정식으로 통성명하는 기분이었다. 나의 일시적 출가를 돕느라 고생한 엄마와 한라산 소주를 기울였다.


점심을 먹고 제주시 노형동의 부동산으로 향했다. 내가 지내게 될 원룸 건물은 서울 사람이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고 했다. 서울에서 제주로의 대탈출 베이스 캠프인 셈이다. 가족이 우르르 들어가니 공인중개사가 당황한 눈치다. 계약 당사자인 나는 멋쩍게 웃었다. 오피스텔 임대차 계약서를 꼼꼼히 살폈다. 부동산 계약은 처음이었다. 서울시 서초구에 사는 30대의 한 여성이 경기도 용인시에 사는 50대의 여성과 부동산 임대 계약을 맺었다. 어른이 된 기분이다. 공인중개사가 우리를 4층의 원룸으로 안내했다. 사진으로만 보던 방이 실제로 나타났다. 깔끔하고 아담해서 혼자 살기 딱 좋아 보였다. 엄마가 이곳저곳을 살펴보고는 이만하면 됐다며 고개를 끄덕이셨다. 서울에서 가져온 짐을 대충 던져놓고 나왔다. 가족 여행이 끝나는 이틀 뒤부터 진짜 독립이 시작된다.


해안 도로를 달려 서귀포시의 독채 펜션에 도착했다. 마당에는 햇살을 즐길 수 있는 테이블과 의자가 있고, 거실에는 텔레비전과 식탁, 소파가 있다. 방은 긴 복도의 양 끝에 하나씩 있었다. 오빠네 가족이 온돌방을 쓰고, 엄마와 내가 침대방을 쓰기로 했다.


그런데 완벽해 보이는 이 펜션에 없는 게 있었다. 방에도, 화장실에도 문이 없다. 이 문제적 구조 때문에 볼일을 볼 때마다 가슴을 졸여야 했다. 조카는 물놀이에 한창 꽂혀 있었고, 하필 엄마와 내가 쓰는 방의 화장실에 욕조가 있었다. 조카는 어른들이 한눈을 팔 때마다 욕조로 달려가서 샤워기를 틀어놓고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다음 날 아침은 조카가 엄마와 함께 목욕하는 소리에 깼다. 침대에서 눈만 떴을 뿐인데 개방형 화장실의 욕조가 바로 보였다. 이 펜션은 찐 가족 전용임이 틀림없다.


조카의 손을 잡고 아침 산책을 나갔다. 돌담이며, 강아지며, 돌멩이 같은 것들을 하나하나 만져보고 참견하는 느린 산책을 했다. 조카는 산책이 마음에 들었는지, 숙소 앞에서 신발을 벗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쳤다. 억지로 집에 들어왔지만 나가자고 떼를 쓰며 돌고래 초음파 소리를 냈다. “고모라고 부르면 나갈게.“ 라고 했더니 조카가 하이 소프라노로 "오~모!“라고 했다. 피곤한 나의 다리에 기적을 행하는 소리였다. 그 와중에 엄마는 '할머니'보다 '고모'를 먼저 말했다고 섭섭해했다. ‘고모’라는 단어가 ‘할머니’보다 발음하기 쉬워서 뜻밖의 수혜를 입었다. 나는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고모다.


2박 3일간의 가족 여행은 20개월 된 조카 위주로 흘러갔다. 조카가 차 안에서 찡찡대기 시작하면 답이 없었다. 조카의 컨디션이 안 좋으면 일정을 변경하거나 취소해야 했다. 낮잠을 자지 못한 조카를 위해 잠시 숙소에 들렀다. 마침 나도 아랫배가 싸르르 아팠다.


“나 방해하지 마~!”


가족에게 접근 금지를 선언하고 화장실로 직행했다. 하지만 곧 다다다다 발자국 소리와 함께 조카가 나타나서 씩 웃는다. 안 돼, 저리 가, 지금은 안 된단 말이야. 도대체 왜! 문이 없는 거야!


 "착하지? 고모가 지금은 같이 못 놀아주니까 엄마랑 놀고 있을래?"


알아들었다는 듯이 나를 빤히 쳐다보던 조카가 사라진 지 일 분도 안 돼서 다시 뛰어왔다. 그래, 니 맘대로 해라. 나도 모르겠다. 이 상황이 점점 포기되었다. 다행히 새언니가 조카를 데리고 갔고, 나는 무사히 용무를 마칠 수 있었다.


화장실에서 나오니 가족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새언니가 급히 나를 찾았다. 조카가 처음으로 “맘마”라는 소리를 했다며, 저녁 예약을 앞당겨달라고 했다. 배를 비우자마자 채우러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하지만 조카는 막상 스테이크가 나오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결국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늦게까지 문을 연 식당에서 공깃밥을 포장해와서 김에 싸서 밥을 먹였다. 조카에게 하루 세 번 밥을 먹이는 게 가족 여행 중 가장 중요한 일과였다.


마침내 여행 마지막 날이 되었다. 오후 4시, 식사를 하기에 애매한 시간이었지만 조카에게 밥을 먹여야 해서 다 같이 이른 저녁을 먹었다. 가족과의 마지막 만찬이었다. 내일부터는 혼밥의 시대가 열린다.


원룸 앞에서 차 문이 열리고, 혼자 내렸다. 세 달간의 긴 이별을 알 리 없는 조카가 해맑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엄마는 나에게 인상적인 말을 남기고 차문을 닫았다.

“올라올 땐 혼자 올라오지 말고 둘이 와, 호호호.“

훅 들어온 공격을 받아치지 못하고, 허무하게 작별 인사를 했다.


‘제주에 글 쓰러 온 건데, 썸도 타야 하나?’

새로운 고민거리를 안고 원룸에 들어섰다. 시끌벅적한 가족으로부터 벗어나 혼자가 되고 싶었는데, 막상 혼자가 되니 무섭다. 적막하기까지 한 고요함이 낯설다. 이제부터는 모든 걸 혼자 해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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