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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바람 Oct 21. 2022

#5 혼자가 되다

34년 만에 처음으로 나만의 공간을 갖게 되었다. 혼자 살아보고 싶다는 꿈을 계속 꿔왔더니 꿈에 그리던 상황이 진짜로 일어났다. 작정하고 의도한 내 인생의 커다란 쉼표였다. 앞으로 세 달간 이 방에서 장편 소설을 쓸 생각에 가슴이 웅장해졌다.


시계를 보니 오후 5시. 금방 어둑어둑해질 시간이었다. 오늘 꼭 해야 할 일이 뭘까? 잠자리 준비가 급선무였다. 이불과 침대보, 베개 커버를 커다란 가방에 쑤셔 넣고 난생처음 빨래방에 갔다. 세탁기와 건조기의 사용법을 손가락으로 하나씩 짚어가면서 읽었다. 500원짜리 동전 10개를 넣고 세탁기를 돌렸다. 30분 만에 세탁이 끝나고, 건조기로 잘 말린 이불을 들고 방으로 돌아왔다. 서울에서 들고 온 이불과 적절히 배치해서 아늑한 잠자리를 만들었다.


다음으로 원룸 주방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주방에는 기본적으로 큰 냄비와 작은 냄비, 가위, 뒤집개, 국자 등이 구비되어 있었다. 찬장에는 밥그릇과 국그릇, 도마, 식칼 등이 있었다. 주방에서 가장 마음에 든 건 큰 냉장고였다. 가족과 함께 살 때 냉장고는 엄마의 공간이었다. 처음으로 나만의 냉장고가 생긴 것이다. 지내는 동안 내 취향대로 칸칸이 채워나가는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설레는 마음으로 첫 장보기에 나섰다. 원룸에서 5분 거리에 대형 마트가 있다. 한 달 살기 선배들의 팁 중 하나가 번화가에 숙소를 잡으라는 것이었다. 바닷가 시골집에 살면 낭만적일 것 같지만, 여러모로 불편하다고 했다. 게다가 나는 차도 없는 뚜벅이였다. 제주에서의 마트권은 서울에서의 역세권만큼 중요한 의미였다.


플라스틱 장바구니를 팔에 끼고 가볍게 장보기를 시작했다. 제주 삼다수가 2리터에 560원이었다. 머무르는 동안 삼다수는 원 없이 먹고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두 번째 품목은 두루마리 화장지. 손으로 들고 갈 수 있는 9개짜리 알뜰 상품을 골랐다. 그리고 생필품 코너에 이르자 내 발걸음은 바빠졌다. 아기자기한 생활용품을 보니 쇼핑 본능이 살아났다. 급기야 장바구니를 카트로 바꾸고 이것저것 쓸어 담기 시작했다. 고무장갑, 키친타월, 빨간 노끈, 화장실 슬리퍼, 냄비받침, 주걱, 쓰레기통, 컵 등등.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폭풍 쇼핑을 했다.

담을 땐 좋았는데 막상 쓸어 담고 나니 들고 갈 게 걱정되었다. 배달은 인터넷 주문으로만 가능하다고 했다. 숙소까지 걸어서 200미터 거리라 택시 타기도 애매했다. 할 수 없이 순례자의 길을 걷는 것처럼 힘겹게 집에 도착했다. 마음속으로 내일 할 일을 정했다. ‘대형마트 몰에 회원 가입하고 인터넷으로 장 보기.’


방에서 본격적으로 짐을 풀었다. 세 달치 화장품을 세팅하고, 옷장에 내 옷을 걸어두니 제법 내 집처럼 느껴졌다. 옷은 겨울옷, 봄옷, 여름옷으로 다양했다. 내가 머무는 기간인 3, 4, 5월은 계절의 변화가 커서 짐을 줄일 수가 없었다. 다음으로 90 캡슐이 든 철분제 한 통을 잘 보이는 곳에 두었다. 이 약통이 바닥을 보일 때쯤 서울에 올라갈 준비를 하고 있겠지.


책상에는 노트북을 설치했다. 1킬로그램이 조금 넘는 가벼운 노트북을 이번 기회에 하나 샀다. ‘빵 굽는 타자기’처럼 노트북이 나에게 글쓰기 신을 내려주기를 빌었다. 주방에는 집에서 보이는 대로 챙겨 온 밀폐 용기, 수저, 라면, 김, 김치, 캔맥주 등을 세팅했다. 그밖에 치약이나 샴푸, 수건 등을 욕실에 정리했다. 없으면 사야 하는 것은 다 쓸어왔다. 원래 딸이란 집안의 기둥뿌리를 뽑아가는 존재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중섭 거리에서 산 드림 캐처를 침대 맡에 걸고, 주문을 걸었다.


‘부디 악몽은 물리쳐 주시고, 좋은 꿈만 꾸게 해 주세요. 혼자라서 무섭거든요.'


첫날이라 무섭거나 외로울 줄 알았는데, 피곤해서 그런지 쉽게 잠이 들었다. 조카가 “고모”라고 외치며 졸졸 따라다니는 시끄러운 꿈도 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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