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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바람 Oct 24. 2022

#6 달콤 살벌한 이웃의 등장

제주에 내려오기 전에 블로그를 시작했다. 집필 기간 동안 마주할 외로움이 두려워서 세상과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고 싶었다. 나를 드러내면 나와 비슷한 사람들과 연결될지도 모른다는 기대도 있었다. 운 좋게도 내가 묵게 될 원룸의 같은 동에 사는 A를 알게 되었다. 2주 먼저 도착했다는 A에게 유용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원룸에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 날, A가 저녁에 놀러 와도 되냐고 연락했다. 훅 들어오는 친밀함에 당황스러웠지만 그러라고 했다. 그렇게 그녀는 내 원룸의 첫 손님이 되었다. A에게 이름이 예쁘다고 하자 자기가 좋아하는 글자로 만든 이름이라며, 제주에서는 이 이름으로 불러달라고 했다. 덕분에 나는 마지막까지 그녀의 본명을 알지 못했다. 그녀는 나보다 열 살 어렸고, 제주에 남자 친구가 있었다. 그녀는 잠시 레스토랑에서 알바를 하고 있다고 했다. A는 낯을 가리지 않았고, 매우 수다스러웠다. 슬슬 피곤해지던 찰나에 휴대폰을 손에서 놓지 않던 A가 갑자기 짜증을 냈다. 남자 친구가 술을 마시고 있는데 연락이 안 된다고 했다. 우리 집에 왔을 때부터 5분에 한 번씩 카톡을 하고 있었다. 제삼자인 내가 봐도 과해 보였다. A는 카톡에 답이 없자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전화를 했다. 10통이 넘어가자 친구 찾기 앱으로 위치 추적을 했다. A는 남자 친구의 위치를 파악하더니 근처 술집 5군데에 전화를 돌렸다. 그녀의 행동이 범상치 않았다. 마침내 어느 술집 카운터 전화로 A의 남자 친구 목소리가 들렸다.


"야, 뭐야! 너 여기 어떻게 알고 전화했어?"

그녀의 남자 친구 목소리에서 당황스러움과 공포가 느껴졌다. A는 남자 친구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왜 전화를 안 받아. 언제 올 거야?"

대화로 미루어 보건대, 남자 친구와 반 동거 상태인 것 같았다. 그녀의 집착이 나에게까지 확장되지 않기를 바라며, 밤 11시가 되어서야 그녀를 간신히 돌려보냈다.


입도 첫 주말에 새별오름 들불 축제가 열렸다. 들불 축제는 가축을 방목하기 전에 들판의 해묵은 풀을 없애고 새 풀이 돋아날 수 있도록 방애를 하던 옛 목축 문화를 계승한 것이다. 이 축제에 대해서는 부동산 아저씨에게 처음 들었고, 그다음엔 텔레비전을 켜면 들불 축제 이야기로 떠들썩해서 모를 수가 없었다. ‘축제는 무슨 축제야, 글 쓰러 온 건데...'라며 집콕하려고 했지만, 그러기엔 너무나 빅 이벤트였다. 오름 하나를 통째로 태운다니, 엄청난 규모의 불장난이 틀림없었다. 그때 A에게 같이 가자는 연락이 왔다. 혼자 가기는 애매하던 차에 잘 됐다 싶었다. 달콤 살벌한 그녀와 동행하기로 했다.


행사용 셔틀버스를 타고 허허벌판에 있는 새별 오름에 도착했다. 그곳은 이미 제주의 매서운 바람에 점령당해 있었다. 겨울 잠바에 목도리, 장갑도 모자라서 핫팩을 붙이고, 손난로까지 챙겨 왔는데도 추웠다. 추위를 피해 들어간 부녀회 먹거리 마당에서 브로콜리 쑥 부침개와 국수를 먹었다. 제주에서 먹어서 그런지 제주스러운 맛이 났다. A가 현금이 없다고 해서 내가 샀다. 그 뒤로도 A는 만날 때마다 현금이 없다고 했다.


마지막 공연이 끝나고, 횃불 점화 및 횃불 대행진이 시작되었다. 이쪽 횃불에서 저쪽 횃불로 불씨가 전달되었다. 무대 앞에 있던 우리도 얼결에 행진에 참여하게 되었다. 수백 명의 횃불 대열에 합류하고 나니 어쩐지 민중 봉기의 한 장면 같았다. 처음엔 활활 타오르는 불길이 무서웠지만 45도로 들고 걸으니 괜찮았다. 횃불을 든 A가 자기 사진을 많이 찍어달라고 요청했다. 나는 그녀의 전속 사진작가가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대형 희망 불씨 점화가 시작되었다. 국가가 허락한 공식적인 불장난이었다. 활활 타오르는 오름을 보며 홀린 듯이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사진작가 김영갑이 말한 '삽시간의 황홀'이라는 게 이런 건가 싶었다. 네로 황제가 어떤 아름다움에 반했었는지 알 것 같았다. 화마가 나를 집어삼킬 것 같아 무서웠지만, 불꽃은 치명적인 황홀함을 안겨주었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뜨거운 불의 축제 한가운데서 등단하게 해 달라는 소원을 빌었다. 다시는 회사원으로 돌아가지 않게 해 달라고, 글로 먹고살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 불의 정령과 교감한 것처럼 찌릿찌릿한 기분이 들었다. 잊지 못할 경험이었다.


A가 남자 친구의 퇴근 시간까지 술을 마시자고 했지만, 적당히 거절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가방과 옷에서 그을음 냄새가 났다. 빨래로 불장난의 대가를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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