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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바람 Oct 24. 2022

#7 소설의 첫 삽을 뜨다

<캄캄한 시골길이었다. 희미한 불빛을 따라 한참을 걸어가니 작은 병원이 나타났다. 문이 열린 병실의 한 침대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침대에 누워 있는 사람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그의 아버지임을 알 수 있었다. 그분은 무표정한 얼굴로 병원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덮고 있는 이불의 모양새가 어딘지 어색했다. 조심스럽게 들춰보니 하반신이 없었다. 한참을 쳐다보다가 코드가 얽혀 있는 의료 기기의 전원을 내렸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미친 듯이 병원을 빠져나왔다.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세차게 펄떡거렸다. 서늘한 기분이 들어 주변을 둘러보자 커다란 개 한 마리가 어둠 속에서 가르릉거렸다. 놀라서 뒷걸음질을 쳤지만, 개가 더 빨랐다. 놈은 무서운 속도로 달려들었고, 나는 비명을 질렀다. 꿈이었다.>


내가 쓰고 있는 소설의 도입부다. 여자 주인공이 한 남자와 세 번의 만남과 이별을 하는 연애 소설이다. 사랑이야말로 인류와 역사를 관통하는 주제다. ‘폭풍의 언덕' 같은 절절한 사랑 이야기를 써보고 싶었다. 증오와 배신, 섹스에 대해 거침없이 쓸 수 있는 작가가 되는 것, 그게 나의 목표다.


내 소설의 제목은 '아버지의 유산'이다. 소설의 기초 공사는 서울에서 끝냈다. 연습장에 전체적인 사건의 흐름을 그려놓고, 기승전결에 따른 대략적인 페이지 배분을 끝냈다. 연애 소설인만큼 여자 주인공과 남자 주인공의 캐릭터 설정에 공을 들였다.


<줄거리>

세 남매에게 뛰어난 두뇌를 물려줬지만 불의의 사고로 자식들의 삶에 평생 짐이 된 아버지. 아버지를 위해 살아오던 윤비운이 소원을 만나면서 사랑에 눈을 뜨는 이야기.


<등장인물>

소원: 성이 소, 이름이 원. 대한민국 표준의 가치관과 연애관을 가진 여자 주인공.


윤비운: 아버지에게 뛰어난 두뇌를 물려받은 천재 앱 개발자. 사고로 식물인간이 된 아버지 때문에 자신의 인생을 온전히 살아본 적이 없음. 형과 누나가 있으며, 형 윤오제는 미국에 있는 작은아버지의 양자로 들어가서 하버드대 철학과 교수가 됨. '안락사‘에 대한 테드(TED) 강의로 유명한 지식인. 누나 윤윤서는 7급 공무원으로 구청에서 근무함. 누나와 비운은 월급의 대부분을 아버지 병원비로 쓰면서 살아옴.


줄거리와 등장인물을 정한 뒤에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문장들을 그대로 받아 적었다.


 나는 그에게 수학 공식처럼 사랑을 증명해달라고 했다. 내가 틀렸다. 사랑은 증명하는 게 아니고 종교처럼 믿는 것이다. 지금 내 앞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닌 것처럼.

나는 그가 나를 표현할 때 사용하는 단어가 좋았다. 내가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 단어들을 그가 술자리에서 남발하는 걸 들었을 때 알 수 없는 배신감을 느꼈다.

행복해지는 걸 두려워하지 않기로 했다. 행복한 게 두려운 이유는 곧 불행이 올 것 같은 불안감 때문이었다.

우리는 어쩌면 같은 단어를 다른 뜻으로 받아들이고 있는지도 몰랐다.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또다시 상처를 받으면 영영 일어서지 못할 것 같았다.

이제는 나도 아침이 오는 게 두려워졌다. 그의 차갑고 감정 없는 회색 눈동자 앞에서 내 감정을 숨기는 건 쉽지 않았다.

미래에 그가 나의 무엇이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는 하루도 가볍게 살아가지 못했다.

몸이 열리자 마음도 열렸다.


장바구니에 물건을 담듯이 떠오르는 단어와 문장을 워드 파일에 담았다. 이 문장들이 세상의 빛을 보게 하려면 하나의 완성된 이야기를 써야 했다. 단어들로 문장을 만들고, 만들어진 문장들로 하나의 단락을 만들고,  그 단락들을 모아서 한 페이지씩 정성껏 써 내려가야 한다. 장편 소설 공모전의 원고 분량은 글자 크기 10포인트를 기준으로 했을 때 A4 용지 130장 정도 된다. 이제 엉덩이의 힘으로 성실하게 쓰는 일만 남았다.


어느 순간부터 내 머릿속에는 소원과 윤비운이 살기 시작했다. 나는 매일 그들과 대화를 나누며 하루를 시작했다. 가끔 나에게 세 개의 자아가 있는 것처럼 혼란스러웠다. 이러다 다중인격이 되는 건 아닐까, 하는 쓸데없는 걱정까지 생겼다. 서울에서 오는 가족과 친구의 연락을 일부러 받지 않았다. 혼자인 상태에서 스스로를 끝없이 몰아붙이고 싶었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버릇이 생겼다. 며칠간 사람과 대화를 나누지 못하자 내 목소리가 궁금해졌다. 내 성대가 멀쩡한지 확인하고 싶어졌다.


“가만있어보자, 그걸 어디다 뒀더라?”

“오늘 뭐부터 하기로 했지?”

“물이 다 떨어졌나?”


그렇게 혼잣말이 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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