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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바람 Oct 25. 2022

#8 장보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1. 대형마트

입도 이튿날, 대형마트 온라인몰에 회원 가입을 했다. 살 게 제법 많았다. 무겁거나 부피가 있는 제품을 온라인으로 주문했다. 다른 잡동사니와 간식은 직접 가서 고르기로 했다. 전날과 마찬가지로 다이소 코너에서 고뇌와 번민의 시간을 보냈다. 필수품인가, 사치품인가에 대한 기준이 갈대처럼 흔들렸다. 집필에 꼭 필요한 방석과 등쿠션을 먼저 집었다. 다음으로는 작은 컵을 하나 샀다. 탁상 거울과 프라이팬, 주방 장갑도 장바구니에 넣었다. 우유와 사과 주스, 달걀 등을 담고, 음쓰 봉투까지 담는 것으로 제주에서의 두 번째 쇼핑을 마무리했다. 오늘도 숙소까지 이고 지고 걷는 순례자의 길이 펼쳐졌다.


셋째 날은 정말 집에만 있으려고 했다. 하지만 아침에 김치찌개를 끓였더니 당면을 넣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그래서 또 마트에 갔다. 계산대에서 보니 내 장바구니에는 어느새 한라봉 유자 요구르트가 자리를 잡고 있다. 이건 어디까지나 지역 경제를 위한 합리적인 소비다. 혼자 산 지 넷째 날. 물이 떨어져서 제주 삼다수를 사러 마트에 갔다. 이제 나는 장보기를 ‘마트 산책' 혹은 '마트 운동'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2. 동문 재래시장

기본적인 먹거리가 갖춰지니까 새로운 걱정거리가 생겼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제주의 드센 바람이었다. 침대가 창가에 붙어 있어서 더 매섭게 느껴졌다. 급한 대로 집에 있는 비닐봉지를 모아서 창문에 다닥다닥 붙였지만 근본적인 조치가 필요했다. 창문에 붙일 두툼한 비닐을 사러 동문 재래시장에 가기로 했다. 거기에 가면 없는 게 없다고 어디선가 들은 기억이 났다. 시내버스를 타고 동문로터리 정류장에서 내렸다. 빙떡으로 허기를 달래고, 지업사에서 두꺼운 비닐 4마와 테이프를 구입했다. 깐 양파 5개를 천 원에 사고, 호떡을 하나 물고 시장을 빠져나왔다.


버스 기사가 틀어놓은 라디오를 들으며 바깥 경치를 한가롭게 구경했다. 공항을 지나는 노선 덕분에 여행객들의 들뜬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나도 마음만 먹으면 어디든지 떠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시장을 다녀오면서도 공항을 스쳐 지나갈 수 있는 곳이 제주였다.


3. 제주오일장

신선한 채소를 사고 싶어서 제주 오일장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비가 왔지만 빗줄기가 세지 않아 시장까지 걸어서 갔다. 생각보다 쉽게 길을 찾자 제주도민이 되어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대부분 바퀴 달린 장바구니를 끌고 다녔다. 맨몸으로 온 만큼 욕심내지 않기로 다짐했다.


채소 가게에서 바구니에 원하는 채소를 담아 가져 가면 저울에 달아주었다. 야채 종류가 다양해서 조금씩 담았는데도 결국 욕심을 부렸다. 2천 원만 내라며 활짝 웃는 채소가게 총각의 미소에 잠시 설렜다. 결국 쌈배추와 구좌 당근까지 샀다. 그리고 냉동 삼겹살 8줄을 만 원에 샀다. 혼자만의 삼겹살 파티로 며칠에 걸쳐 채소와 함께 야무지게 먹었다.


시장에 나온 김에 한 끼를 해결하고 가기로 했다. 쭉 늘어선 식당 중에 유난히 바글거리는 식당으로 향했다. 제주에서의 첫 혼밥이었다. 달랑 순댓국밥 하나를 시켰는데 반찬으로 양념 게장이 나온다. 반찬 가짓수도 많아서 황송하다. 그 와중에 다양한 사람을 구경했다. 물을 안 준다고 쩌렁쩌렁 화내는 아저씨가 있고, 반찬 리필을 안 해줬다고 버럭 화내는 할아버지도 있다. 그 할아버지는 “내가 여기 얻어먹으러 왔어?"라고 하시며 분을 삭이지 못하셨다. 4,000원짜리 순댓국 하나로 세상을 구경했다.


4. 열일하는 냉장고

혼자 살기 시작하면서 나의 첫 번째 고민은 '갑자기 배가 고프면 어떡하지?'였다. 제주에 내려올 때는 ‘맛집이 수두룩한데 뭐하러 집에서 먹어?’라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맛집 탐험은 시간과 에너지가 필요했다. 무엇보다 눈을 뜨자마자 배가 고팠다. 그래서 뜻하지 않게 요리가 늘었다.


제일 많이 해먹은 음식대로 나열해 보자면, 우선 참치 김치찌개다. 집에서 가져온 묵은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한 번 끊여놓으면 재탕이 가능하다. 밥은 해 먹다가 말았다. 처음에는 원룸에 비치되어 있던 전기밥솥에 밥을 했는데, 밥이 자꾸 남았다. 그래서 햇반을 샀다. 밥 먹기 귀찮은 날은 식빵을 먹었다. 다양한 방법으로 먹어보겠다고 사과잼, 치즈, 버터를 샀다. 계란과 우유를 섞은 물에 식빵을 살짝 담갔다 빼서 버터에 굽는 계란 토스트, 프라이팬에 버터로 빵을 굽고, 따끈한 빵 사이에 치즈를 넣는 치즈 토스트를 번갈아 해 먹었다.


그렇게 식생활이 안정되어 가던 시점에 변수가 생겼다. 원룸 이웃 A가 서울에 올라가면서 냉장고에 남은 음식을 다 주고 간 것이다. 대파, 떡국떡, 너비아니, 달걀 4개, 깻잎, 무말랭이, 포장 김 3개, 아이스크림, 부침가루, 그리고 한라산 소주 3병. 하이라이트는 전날 밤에 만들었다는 샌드위치 속 재료였다. 커다란 락앤락 통에 감자와 마카로니를 버무려놓았다. 어림잡아 30인분은 될 것 같았다. 같이 준 식빵도 유통 기한이 이틀밖에 남지 않았다. 고민 끝에 안 하던 짓을 처음으로 시도했다. 식빵 8조각으로 샌드위치를 만들어서 부동산에 놀러 갔다. 내 방문은 제주도민처럼 자연스러웠다.


여차 저차 한 이유로 냉장고가 가득 찼다. 최소 일주일간은 마트 출입 금지다. 외식도 당분간 자제해야 한다.

유통 기한 순서대로 먹는 계획을 세운다. 내 머릿속은 끼니와 소설에 대한 생각이 사이좋게 반씩 차지했다.

냉장고도 채웠고, 솔솔 들어오는 바람도 막았으니 이제 글만 쓰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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