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봄바람 Oct 25. 2022

#9 소설을 쓰기 위해 필요한 세 가지 조건

1. 첫 번째 조건: 시간 관리

원룸의 커다란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 덕분에 낮과 밤의 경계가 명확하다. 하지만 혼자 산 지 며칠 만에 시간 개념이 희미해졌다. 아침에 일어나서 밥을 먹고, 이틀에 한 번 꼴로 세탁기를 돌린다. 설거지까지 하고 나면 어느새 오전이 지나갔다. 어영부영 점심을 먹고 나면 하루의 반을 써버린 느낌이다. 시간을 눈에 보이는 실체로 붙잡아둘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탁상 달력과 벽걸이 시계를 샀다. (결국 매일 무언가를 산다.) 이번에 산 탁상 달력으로 말하자면 작은 시계가 달린 우드 달력이다. 간단한 필기도구를 넣을 수 있는 수납장도 있어서 책상 위가 깔끔해졌다. 벽걸이 시계는 숫자가 큼직하게 들어간 무소음 시계로 샀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바로 시간을 알 수 있어서 좋다. 시계를 보며 하루를 쪼개고, 달력으로 일주일 계획을 세우며 시간 관리를 했다.


2. 두 번째 조건: 건강

어느 날, 자고 일어났더니 목이 돌처럼 뻣뻣하게 굳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노트북 앞에 오래 앉아 있었더니 병이 도진 것이다. 내 몸은 총체적 난국이 따로 없다. 일자목에 척추 측만증, 손목 터널 증후군까지 있어서 장시간 작업에 부적합한 몸이다. 어깨, 손목, 허리, 여기저기 골고루 쑤시다. 글을 쓸 수 있는 환경이 갖춰졌는데, 정작 오래 앉아 있을 체력이 없다니 나 자신이 한심했다.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는 건강해야 한다.


즉각적인 처치가 필요해서 마사지 샵에서 어깨를 집중적으로 풀었다. 하지만 마사지를 받은 지 하루 만에 어깨가 다시 뭉쳤다. 밤새 뒤척이다가 날이 밝자 근처 한의원을 찾아갔다. 10분이 넘게 초진을 받았다.


"자세가 자꾸 앞으로 기울어서 그래요. 어깨를 펴주는 스트레칭을 한 시간에 1분씩 해주세요."

한 시간에 1분. 열심히 메모하며 의사 선생님의 말을 경청했다. ‘제주에 내려와서 아프게 된 건 아니죠?’라고 물어보셔서 ‘절대 아니에요, 서울에서부터 이랬어요’라고 대답했다.

"제주에 내려와서 제일 편한 기운을 받으실 수 있을 겁니다."

이 말을 시작으로 물리치료부터 시침, 부황까지 정성껏 치료받았다. 일주일 동안은 하루도 거르지 말고 오라고 했다. 덕분에 한의원 방문이 가장 중요한 일과가 되었다.


3. 세 번째 조건: 가벼운 운동

건강을 위해 하루 한 시간 이상 걷기로 했다. 첫 산책의 목적지는 집에서 2km 거리의 한라 수목원으로 정했다. 집에서 출발한 지 30분 만에 한라수목원에 도착했다. 입구에서부터 나무의 끝없는 행렬이 펼쳐졌다. 건강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걸었다. 계속 걸었다. 피톤치드를 마시며 삼림욕을 했다.


두 번째 목적지는 탐라 도서관이었다. 책이 있는 곳에 가고 싶었다. 1층 로비에 진열된 새로 들어온 책의 표지들을 보니 설렜다. 2층 열람실의 ‘문학' 코너로 직진해서 문학상 수상작을 찾았다. 문학동네 소설상 수상작인 '캐비닛'과 '죽을 만큼 아프진 않아‘를 골랐다. 난 아직 멀었구나 싶은 좌절감과 나도 이렇게 잘 쓰고 싶다는 욕망이 교차했다.


세 번째 목적지는 제주 도립 미술관이었다. 신비의 도로 근처에 있는 제주 도립 미술관은 섬을 닮았다. 미술관 전체를 잔잔한 물결이 둘러싸고 있다. 미술관 내부에 햇살이 가득해서 미술관 안에서도 일광욕을 즐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옥상 정원에서는 저 멀리 눈 덮인 한라산이 보였다. 천 원의 행복이었다.


집까지 걸어가면서 '동네'의 정의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어디까지가 동네일까? 제주에 와서 내가 내린 결론은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가 동네라는 것이다. 우리 동네에는 대형 마트와 영화관이 있고, 제주 오일장도 있고, 도서관도 있고, 미술관도 있다. 삶이 풍요로워지는 기분이다. 땀이 날 정도로 걸었더니 집까지 50분이 걸렸다. 산책을 끝내고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4. 소설을 쓴다는 것

하루 8시간, 주 5일 글쓰기를 목표로 정했다. 실제로는 매일 5시간 정도 글을 썼고, 하루 3페이지 정도의 작업량이 나왔다. 산술적으로 일주일에 15페이지씩 쓰게 되는 셈이다. 이대로만 써진다면 8주 동안 120페이지를 쓸 수 있다. 이제 남은 건 성실함이다.


글을 쓸 때 외에는 재충전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재충전의 시간도 결국은 글을 쓰기 위한 시간이다. 요리에 지나치게 몰두하거나 과식하지 않으려고 했고, 운동도 적당히 하려고 노력했다. 잠을 자는 무의식의 순간도 활용했다. 잠들기 전에 마지막 단락을 되뇌면서 잤다. 자다가 좋은 생각이 나서 눈이 번쩍 떠지면 떠오르는 단어를 휴대폰 메모장에 적었다. 이런 방법으로 집필 전의 예열 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다. 또한 글쓰기보다 재미있는 일을 만들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독서를 자제했다. 책을 읽다 보면 좋은 독자로 사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위험했다. 글쓰기에서 도망치고 싶은 생각을 차단해야 했다.


아침 먹고 한의원을 가고, 글을 쓰다가 점심을 먹는다. 산책을 다녀와서 글을 쓰고 저녁을 먹는다.

글쓰기를 생각하며 잠이 든다.


이것이 어느 소설가 지망생의 하루다.

이전 08화 #8 장보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