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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바람 Oct 26. 2022

#10 나 홀로 게하 여행

제주에 소설만 쓰러 온 건 아니다. 회사를 그만두면서 사람에게 받은 상처를 치유할 시간이 필요했다. 입도 2주째 되던 어느 날, 다시 사람이 그리워졌다. 떠들썩한 분위기에서 주말을 보내고 싶어 게하 연박을 예약했다.

여행 당일, 게하 사장님이 시내에 나올 일이 있다며 픽업해준다고 했다. 나 외에도 한 명의 여행자가 더 있었다. 우리 셋은 만나자마자 자연스럽게 하나로마트에서 장을 봤다. 감자 한 알에 90원이라는 충격적인 농산물 쇼핑을 마치고 게하로 이동했다.


게스트하우스 이름이 계란후라이다. 한라산은 계란 노른자처럼, 제주의 나머지 부분은 흰자처럼 보인다고 해서 계란후라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냉장고에는 계란이 가득하고, 게스트들은 계란을 마음껏 요리해서 먹을 수 있다. 인테리어 소품도 온통 계란 모양이라 마치 핼러윈 파티 같았다.


낮 시간의 게하는 행원리의 사랑방이었다. 사장님의 손님들로 거실이 북적거렸다. 시인 한 분, 음식점 사장, 홍대 가수 언니가 차례로 등장했다. 전직 요리사가 주방에서 캘리포니아 롤과 족발을 만들고, 카페 사장이 보드카를 들고 나타났다. 곧 홍대 가수 언니가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우리는 갬성에 젖어 멸치에 한라산 소주를 한 잔씩 들이켰다.


오후 5시부터 시작된 파티는 새벽 2시까지 이어졌다. 구좌 당근 케이크를 안주 삼아 소주로 낮술을 먹다가 저녁 식사로 캘리포니아 롤과 족발, 만둣국을 먹은 후에 치맥으로 마무리했다. 낯선 사람들과 하이 텐션으로 술자리를 즐긴 후에 여자 도미토리의 침대로 기어들어가 장렬하게 전사했다.


다음 날 아침, 처음 만난 사람들과 머리를 맞대고 아침밥을 먹었다. 하루 만에 가족이 된 기분이었다. 아침 식사 후에는 다 같이 차를 마시러 갔다. 농가 주택을 개조해서 만든 oo다방의 시그니처 메뉴는 제주 구좌 당근 주스였다. 당근 자체가 달아서 건강한 단맛이 났다. 우리가 오늘의 첫 손님이기도 하고, 어젯밤의 인연도 있어서 사장님이 당근 주스 두 잔을 서비스로 주셨다. 사진을 남기려고 햇살이 잘 드는 테이블로 주스를 들고 가서 찍었다. 이때 일행들은 ‘혼자서만 먹으려고 통째로 들고 튀는구나'라고 나의 행동을 오해했다며 깔깔거렸다. 하루 만에 스스럼없는 사이가 되었다.


차를 마신 뒤에도 우리는 같이 움직였다. 5분 만에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아끈다랑쉬 오름에 올랐다. 제주에서 술을 마시면 공기가 좋아서 금방 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름에서 부는 바람은 술 깨는 바람이었다.


점심은 네 명이서 전복죽, 전복 돌솥밥, 전복 구이를 시켜서 나눠 먹었다. 전복 한 입 먹고 철썩이는 파도 한 번 보고, 돌솥밥 한 숟가락 먹고 갈매기 한 번 보면서 느긋하게 먹었다. 어느덧 헤어질 시간이었다. 화가 오빠는 본인이 성공하면 자서전을 써달라고 했고, 공군 오빠는 책이 출간되면 백 권을 사서 부대원들에게 한 권씩 돌리겠다고 했다. 가능성을 현실로 만들어 줄 에너지가 내 주변으로 몰려드는 기분이었다.


다시 혼자가 되었다. 카페에서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어느새 밖이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했고, 시계를 보니 오후 6시가 넘어 있었다. 저녁 시간을 놓칠까 봐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변가를 따라 부지런히 걷기 시작했다. 월정리에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이 큰 위안이 되었다. 게스트하우스는 연박을 해봐야 진짜 묘미를 알 수 있다고 하던데, 이틀 만에 숙소가 편하게 느껴진다.


오늘의 저녁 메뉴는 ‘오징어 돼지고기 두루치기 상추쌈’이었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 다시 파티가 시작되었다. 게하에는 신기하게도 매일 요리사가 한 명씩 나타났다. 오늘의 새로운 요리사가 만든 어묵탕과 누군가 시내에서 공수해 온 카레 치킨이 등장했다. 게하의 밤은 오늘도 맛있게 깊어갔다. 어제에 이어 과음을 했다.


머리가 지끈거려서 새벽 5시에 잠에서 깼다. 두통약을 먹고 다시 누웠지만 한 번 깬 잠은 다시 오지 않았다. 새까만 어둠 속에서 눈을 뜨고 있자니 문장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떠오른 문장들을 메모하다가 어느새 날이 밝았다.


여자 두 명이 오후 비행기로 서울로 돌아간다고 해서 제주시까지 함께 이동하기로 했다. 월정리 카페촌에서 느긋하게 티타임을 즐긴 후에 버스 정류장을 찾아서 걷기 시작했다. 정류장 위치를 안다는 그녀들의 말을 믿고 뒤따라 걸었는데, 한참을 걸어도 버스 정류장 팻말이 나타나지 않았다. 어쩌다 보니 올레길에 들어선 우리는 그냥 이 상황을 즐기기로 했다. 하지만 걷기 시작한 지 30분이 지날 무렵, 우리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그제서야 길을 물어보려고 했지만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었다. 우리의 정확한 위치를 몰라서 택시를 부를 수도 없었다. 왕언니인 내가 나서야 할 타이밍이었다. 큰 도로로 나가 용기 내어 히치 하이킹을 시도했다. 차가 지나갈 때마다 간절함을 담아 손을 흔들었고, 다행히 중년 부부의 차를 얻어 탈 수 있었다. 진짜 여행자가 된 기분이었다.


무사히 제주시에 도착한 기념으로 국숫집에서 고기국수와 회 쟁반국수로 마지막 식사를 했다. 길을 잃고 헤매고, 여행이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았지만 “못 본 건 있어도 못 먹은 건 없어요“ 라며 즐거워하는 그녀들의 웃음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무한 긍정녀들의 젊은 에너지가 부러웠다.


서울에서 제주로 내려올 땐 사람이 그리워지기를 바랐고, 게하 여행을 떠날 때는 시내의 원룸이 그리워지기를 바랐다. 원룸에 돌아오니 내 공간이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기분 좋은 나른함과 피곤함을 느끼며 세탁기를 돌렸다.


내일부터는 다시 책상 앞에서 긴 시간을 보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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