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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진스키의 고백』시대를 넘어선 위대한 예술가의 만남

희귀본 사냥 컬렉션②

by 책사냥꾼 유은




"나는 울고 싶은데 신은 내게 쓰라고 명령한다."
『니진스키 영혼의 절규』中


희귀본을 찾아 떠나는 책 사냥의 여정


알라딘 중고서점에 들어서자, 눈길을 사로잡는 문구 하나가 보였습니다.

‘이 광활한 우주에서 이미 사라진 책을 읽는다는 것.’

이 문구는 단순히 서점의 홍보 문구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헌책방이야말로 지상에서 사라져 가는 헌책들을 간신히 구해 내어 다시금 새 생명을 불어넣는, 특별한 공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저 오래된 책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 속에서 그 가치가 더해지고 귀해지는 희귀본들은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보물이 됩니다. 보석 같은 책을 찾아 헤매는 그 감정, 많은 분께서도 깊이 공감하실 것이라 믿습니다.



시간을 거슬러 만난 『니진스키의 고백』 희귀본


오늘 제가 소개해 드릴 책은 바로 현대 발레의 거장, 바슬라프 니진스키(Vaslav Nijinsky)의 『니진스키의 고백』입니다(이하 『고백』. 책의 표지를 넘기니 '2020년 5월 1일, 배다리 아벨 서점'이라고 연필로 적혀 있더군요. 제 기억 속에 소중히 간직되어 있던 책입니다. 초판본은 1975년 4월 20일에 인쇄했는데, 제가 소장하고 있는 이 책은 1979년 10월 30일 제4판으로 이덕희 교수의 번역으로 문예출판사에서 펴내셨더군요. 벌써 5년 전, 제가 이 책을 손에 넣었을 때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릅니다.


하얀색 표지에 연붉은 글씨로 쓰인 '니진스키의 고백'이라는 제목이 당당하게 자리 잡고 있으며, 그 아래에는 마치 팝아트 거장 앤디 워홀이 실크스크린 기법을 이용해 그린 것 같은 니진스키의 초상화가 흑백으로 처리되어 시선을 이끕니다. 알라딘 서점을 통해 재고를 확인해 보니 1979년 출간된 『고백』은 정말 이 우주에서 사라진 듯 희귀해 보입니다.


다행히 같은 번역가에 의해 2002년 『니진스키 영혼의 절규』라는 제목으로 몇 권이 검색될 뿐이었습니다(이하 『절규』). 이 책은 1999년 영역판을 바탕으로 프랑스판과 러시아어 원본을 참조한 것으로, 역시 이덕희 번역가에 의해 20세기 초 유럽 문화계의 상황과 니진스키의 삶, 그가 안무하거나 출연한 수많은 발레 명작에 대해 충실한 주석을 달아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 있다고 합니다.




희귀본에 담긴 역사적 가치: 니진스키 일기의 편집과 복원


니진스키의 아내 로몰라가 처음 발표한 『니진스키의 일기』(국내에서는 『니진스키의 고백(1975)』)는 원본에서 남편의 동성애 관계 등 명성에 해가 될 만한 내용들이 임의로 편집, 삭제된 것이었습니다. 제가 소장한 『고백』이 바로 이렇게 편집된 초판 중 하나죠. 이 책의 진정한 가치는 단순히 오래되어서가 아닙니다. 니진스키의 진솔한 내면이 세상에 온전히 드러나기 전, 그의 기록이 어떻게 다루어졌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적 증거물로써 더욱 깊은 의미를 지닙니다.


교보문고의 <출판사 서평>에 따르면, 우여곡절 끝에 1995년, 니진스키의 둘째 딸 타마라의 결심으로 '전혀 손대지 않은 원본 그대로의 일기'(국내에서는 『절규(2002)』)가 공개되었는데, 이 책을 읽어보자 저는 좀 더 진실의 빛을 마주하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처럼 저는 희귀본을 통해 니진스키의 삶을 마주하며, 훼손된 진실과 복원된 원본 사이의 간극을 직접 체감하는 시공을 초월한 특별한 경험을 했습니다. 책 속에서 과거의 목소리를 찾아내는 이 경이로운 순간을, 여러분도 느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세월이 빚은 희귀본의 매력: 손끝으로 느끼는 시간의 흔적


제가 소장하고 있는 『고백』은 요즘 책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세로 쓰기로 되어 있고, 일반적으로 책을 읽는 순서와는 반대 방향인 맨 뒤쪽부터 읽어나가야 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독특한 물리적 특성 또한 희귀본이 지닌 독창적인 매력 중의 하나입니다. 더구나 책장이 누렇게 변색되어 있어 보물을 다루듯 손을 깨끗이 씻고 소중하게 한 장 한 장 넘겨야 합니다. 자칫 잘못하면 바스러지거나 뜯겨 나갈 수도 있으니까요. 이 모든 것이 이 책을 단순한 종이 묶음이 아닌, 살아 숨 쉬는 역사 그 자체로 느끼게 합니다.


책 표지를 넘기자, 발레 『장미의 정(精)』에서 우아한 의상을 입고 있는 1911년도 니진스키의 흑백 사진이 나타납니다. 이어서 『목신(牧神)의 오후』, 『페트루시카』, 『세헤라자데』 등 그의 주요 발레 공연 사진들이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무용의 신으로 널리 알려진 니진스키의 이름은 세계 발레사에서 이제 하나의 신화적인 존재가 되었다는 역자의 서문이 그의 위상을 실감하게 합니다.


실제로 니진스키는 현대 발레사에서 가장 중요한 무용수로 꼽히며, 그의 공연을 본 관객들은 '신처럼 춤춘다!'라며 감탄했다죠? 이 책은 심각한 정신질환에 빠져들 무렵(1919년부터 6주간) 쓴 일기를 원문 그대로 옮긴 책이기도 합니다. 그는 여성 무용수(발레리나)의 보조자에 불과했던 남성 무용수의 지위를 지금과 같은 수준으로 격상시켰고, 시대를 앞선 파격적인 안무가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습니다.



텍스트 힙(Hip)을 넘어선 희귀본의 울림


요즘 신조어 중에 '텍스트 힙'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문자'를 의미하는 텍스트(text)와 '멋지다', '개성 있다'는 뜻의 '힙(hip)'이 합쳐진 말로, '책 읽는 당신 멋져!'라는 말에 호응하듯 당당히 자신을 뽐내거나, 디지털 기기에 익숙한 MZ세대가 자신의 지적 교양을 고양시키고 취미를 넘어선 자기표현의 수단으로 독서를 활용하는 경향을 나타냅니다. 이는 예전에 여대생들이 핸드백과 별도로 책이나 파일을 들고 다니던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당시에도 이러한 모습이 바로 '텍스트 힙'의 한 모습이 아니었을까요?


몇 년 전 한 TV 프로그램에서 가수 아이유 님이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읽는 장면이 소개되어 많은 시청자의 관심을 받았습니다. 아이유가 보여준 것은 시청자들이 책 읽는 ‘감동’ 이전에 '책을 읽는 연예인'의 멋진 ‘매력’으로 여겨졌고, 심지어 '아이유 북리스트'라는 제목의 블로그가 인터넷에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아이유의 러시아 작가 인문 고전 목록에는 빠져 있지만, 인터넷 서점에서 로쟈라는 필명으로 활동하는 이현우 작가님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외에도 『니진스키 영혼의 절규』를 인생 책으로 꼽는 데 주저함이 없다고 하더군요.


저도 과거 이 책을 수집한 데에는 바로 로쟈 작가님의 글을 통해 이 책을 알게 되었기 때문인데, 수많은 책들 속에서 희귀본을 '사냥'하고 그것이 품고 있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것은, 시대가 바뀌어도 변치 않는 독서의 깊이와 즐거움을 선사합니다. 이처럼 책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는 '텍스트 힙'이 유행하지만, 저의 '희귀본 사냥'은 단순히 유행을 좇는 것을 넘어, 시대를 넘어선 희귀본과 직접 대화하며 사라져 가는 역사와 깊이 교감하는 더욱 특별한 독서 경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역시 좋은 책은 여러 인연을 통해 독자에게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일기 속, 니진스키의 아프지만 진솔한 고백


"점심 식사는 아주 좋았다. 살짝 익힌 달걀 두 개와 기름에 튀긴 감자와 콩을 먹었으니까. 나는 콩을 좋아하지만, 그것들은 메마르다. 나는 마른 콩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 속엔 생명이 없기 때문이다." _ 『절규』 p.103

(작가의 한마디: 일상 속 사물에서도 생명력을 찾지 못하고 세상 모두를 메마르게 보는, 니진스키의 병적 민감성과 왜곡된 현실 인지가 고독과 단절을 심화시키는 위태로운 심리 상태를 드러냅니다.)


“나는 18살에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치>를 읽었다. 그리고 그 의미를 이해했다. 나는 작가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끙끙대면서 도스토예프스키와 고골리를 연구하였다. 나는 푸쉬킨을 베꼈다.” _ 『고백』 p.81

(작가의 한마디: 젊은 니진스키가 정신 질환 이전, 문학에 대한 순수한 열정과 탐구심을 가졌으며, 자신의 한계를 객관적으로 인지하는 건강한 내면을 보여줍니다.)


"나는 쓰고 싶다. 쓰는 걸 좋아하니까. 오늘은 오랫동안 쓰고 싶다. 많은 것을 말하고 싶으니까. 나는 빨리 쓰진 못하지만 내 손은 빨리 쓴다... 나는 더 많이 쓰고 싶다." _ 『절규』 p.113 (작가의 한마디: 혼란 속에서도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니진스키의 간절한 열망과 강한 의지가 느껴집니다.)


"나는 홀로 남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고독 속에서 울 것이다. 나는 흠뻑 운다. 하지만 쓰는 걸 포기하지는 않으리라." _ 『고백』 p. 54 (작가의 한마디: 홀로 고독하게 울면서도 글쓰기를 놓지 않으려는 그의 의지가 엿보입니다. 동시에 타인의 시선 때문에 자신의 고통을 숨기려 하고, 심지어는 가장 아픈 감정마저 엿보입니다.)


"나는 아내를 사랑한다. 그녀에게 어떤 위에도 가해지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에 나는 그녀를 행복하게 해 주기 위해서 돈을 벌러 가겠다... 그리고 만약에 내가 살해당할 경우에 대비해서 그녀가 곤란 없이 살아가도록 충분한 돈을 벌었으면 좋겠다.” _ 『고백』 p.48

(작가의 한마디: 아내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책임감이 느껴지지만, 동시에 '살해당할 것'이라는 구체적인 피해망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인간적인 사랑과 병적인 불안이 뒤섞인 니진스키의 위태로운 내면을 보여줍니다.)


"나는 더 이상 아내를 신뢰할 수가 없다. 그녀가 내 일기를 진단의 자료로써 의사에게 주려고 하는 것 같으니까 말이다." _ 『고백』 p.48 (작가의 한마디: 점점 병증세가 심해지며 가장 가까운 아내조차 불신하며 일기를 숨기는 니진스키의 극단적인 피해망상과 깊은 고립감이 드러납니다.)



천재의 비극적인 생애: 빛과 그림자


영국의 발레 비평가이자 『니진스키』의 전기 작가인 '리처드 버클'은 비극적인 천재 무용수였던 그의 생애를 다음과 같이 한 문장으로 표현했습니다.


“10년은 자라고, 10년은 배우고, 10년은 춤추고, 나머지 30년은 암흑 속에 가려진 채 살았다”


저는 이 한 문장에서 무용의 신으로 불렸던 한 천재의 환희와 좌절, 그리고 치유되지 못한 영혼의 깊이를 느낍니다. 이미 온전치 못한 정신상태에서 쓴 이 일기를 마지막으로 그는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하게 됩니다.


니진스키의 '고백'을 따라가며, 그 빛과 그림자 속에서 진정한 예술과 인간 본연의 모습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됩니다. 시대의 먼지를 걷어내고 그의 진실을 품고 있는 이 희귀본은, 제게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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