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은 보이지 않지만, 정성은 보입니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우리 곁으로 돌아온 그녀가 힐링과 회복을 위해 한방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퇴근길 마트의 진열대 앞에서 식재료를 고르는 내 손길에도, 새벽어둠을 뚫고 약수터로 향하던 어머니의 발걸음에도, 그 정성이란 것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정성(精誠)'이란 글자를 들여다보면 우리 선조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찧을 정, 정할 정(精)'은 쌀(米)을 푸르게(靑) 정결하게 가린다는 뜻이고,
'정성 성(誠)'은 말씀(言)을 반드시 이룬다(成)는 의미를 담고 있다.
어릴 적 엄마가 밥상에 콩을 부어서 하나하나 가려내던 모습이 생각난다. 그 밥상은 콩을 가려내기 위해 만들어진 도구 같았다. 마치 , 거친 쌀, 조, 수수 따위의 곡식을 찧어 속꺼풀을 벗기고 깨끗하게 쓿듯이, 가장 순수한 마음으로 준비하고, 그 마음을 반드시 행동으로 옮기겠다는 의지가 담긴 글자다. 의지는 지성과 감정의 중간이다. 알면서 행동하는 것이다. 지성은 마음이고, 감정은 행동이다. 마음이 있다면 행동으로 옮긴다는 뜻인 것이다
뇌 건강에 좋은 식재료들을 장바구니에 담으며, 문득 옛 드라마에서 본 장면이 떠올랐다. 한약을 달이며 부채질을 하던 조상들의 모습. "한약은 정성이 반이여"라고 하시던 그 말씀이 이제야 가슴에 와닿는다. 아들이 스테비아를 넣어 블루베리잼 만드는 것을 도우다가 "엄마 진짜 정성이 대단하다"라고 말할 때의 그 뿌듯함도 같은 맥락이었나 보다. 아들의 한 마디에 정성에 대해 깊이 사색하게 된다.
어린 시절,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잠든 나를 깨워 약수터로 향하던 엄마, 새벽 깨끗한 물을 받아서 자식을 위해 공을 들인 것이다. 잠 오는 눈을 비비며 몇 번 따라나서던 기억이 가물거린다. 엄마의 정성 덕분에 지금 이렇게나마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게 된다.
세월이 흘러 엄마는 천주교 신자가 되셨고, 나는 개신교 신자가 되었지만, 정성이라는 것의 본질은 변함이 없다. 지성과 감정의 중간, 안 것을 행동으로 실행하는 그 지점에 정성이 있다. "정성이 하늘에 닿았다"라는 옛말처럼, 진정한 정성은 반드시 그 뜻을 이루어낼 것이다.
주말에 평택에서 친구가 온다. 이번 주말에도 못 갔는데 다음 주말에도 병문안을 못 갈 것 같아 출근 전에 잠시 들르기로 한 것도, 한방병원에서 힐링 중인 그녀를 위해 정성스레 장을 보는 것도, 모두가 정성이라는 이름으로 수놓아지는 일상이다. 보이지 않는 마음을 보이는 행동으로 옮기는 순간, 그것이 바로 정성이 되는 것 아닐까, 이렇게라도 무언가를 해줄 수 있다는 것만으로 감사하다.
때로는 피곤하고 힘들 때도 있지만, 그 정성이 누군가에게는 큰 위로가 되고 힘이 된다는 것을 알기에,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정성을 다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를 사람답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