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그만해도 돼.'
내 안의 작은 악마가 속삭인다.
자기 합리화는 참으로 쉽다.
"이 정도면 충분해. 오늘은 여기까지만, "
1:1 PT를 받을 때가 있었다. 벤치프레스, 20개씩 3세트를 하라고 하는 데 10개를 하고 나면 도저히 더 이상 할 수가 없다. "더 이상 못하겠어요"하면 코치는 단호하게 말한다.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살짝 도와드릴게요." 하면서 운동기구를 들어주는 시늉을 한다. 겨우 마치고 나면 코치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한다. "방금 저는 손가락만 갖다 대고 있었습니다. 스스로 하신 겁니다. 얼마든지 하실 수 있죠." 기만당한 기분에 씁쓸함과 기쁨이 교차한다.
코치가 지켜보면 억지로라도 해내는데, 혼자서 할 때는 도저히 할 수가 없다. 나 자신에게 너무 관대하다. "이 정도면 충분히 많이 했어." 작은 악마는 때를 가리지 않고 찾아와서 달콤한 말로 유혹한다.
필사를 하며 글자 하나하나를 옮겨 적는 일도 마찬가지다. 작심 3일의 유혹은 기다렸다는 듯, "3일 했으면 많이 했어, 이제 그만해"라고 다그친다. "그래, 시간도 없는데, 팔도 아프고, 굳이 해야 할 이유도 없잖아." 또 슬슬 핑곗거리를 가져온다. 꾀가 생기기 시작한다.
왜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야 할까? 모든 결정권이 "나"에게 있기 때문이다. 다른 이에게 물으면 당장은 편하다. 고민할 필요 없이 정해진 답을 받을 던져준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원하는 답이 아닐 수도 있다. 자신에게 질문한다는 것은 내면의 깊은 곳까지 들여다보는 용기다. 피곤하고 귀찮은 행위다. 귀차니즘을 벗어날 때 내면의 나를 만나게 된다. 올바른 선택은 언제나 내 생각 안에 있다. 말하기 전에 세 번 생각, 행동하기 전에 세 번 생각, 생각한다는 것은 결국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친구 딸이 3월 6일 출산예정일이었다. 예정일이 지났는데, 소식이 없어 출근하면서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근무 중이라 긴 대화는 나누지 못했다. 지난 토요일 득남을 했다고 한다. "왜 말을 안 했어." 퇴근 후 통화하기로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런데, 순간 섭섭함이 스며들었다. 토요일 출산했으면 벌써 4일이나 지났는데, 내가 연락할 때까지 연락도 안 하다니, 괘씸한 마음까지 들었다. 오늘 필사한 내용이 떠올랐다. 자신에게 질문하기, "많이 섭섭하지, 왜 그랬을까? 출산했다고 먼저 말하기 좀 그렇지 않았을까, 괜히 출산했다고 알리면 선물 사달라는 뜻으로 전해질수도 있고, 부담될까 봐 연락 안 했을 거야. 그러니 너무 섭섭해하지 마." 내면의 내가 나를 위로해 주었다. "그럴 수도 있겠네." 한결 마음이 편안해졌다.
봄이 되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미세먼지, 사람들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창문을 굳게 닫으며 철통방어를 한다. 그러나 강과 산, 나무들은 어떤가? 그들은 침묵 속에 모든 것을 받아낸다. 부산을 떨지도 않는다. 인간이 거부한 것들을 묵묵히 감당하며 불평 한마디 없이 희생 봉사한다. 때로는 피하고 싶은 상황, 넘고 싶지 않은 한계, 마주하기 싫은 현실과 마주할 때가 있다. 그 허들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넘어설 때, 성장이라는 상이 기다린다.
눈물겹도록 감사한 것은, 매일 새로운 한계에 도전할 기회를 가진다는 사실이다. 오늘의 한계는 내일의 시작점이 된다. 모든 답은 우리 안에 있다. 올바른 질문을 던질 용기만 있다면, 우리는 언제든 한계를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미세먼지가 자욱한 하늘 너머에는 언제나 맑은 하늘이 기다리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