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 #9, 어떤 상황에서든 심각해지면 나만 손해
"왜 내게 이런 좋은 일이 생기지?"
창문 너머로 햇살이 쏟아지던 날, 이 질문이 내 머릿속을 맴돈다. 좋은 일이 생길 때마다 불안해하는 이상한 습관. 그 순간을 온전히 즐기지 못하고 분석의 늪에 빠지는 나를 발견한다. 마치 선물 상자를 받고도 열어보지 않은 채 왜 받았는지만 궁금해하는 어린아이처럼.
5월 5일, 창 틈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받으며 침대에서 뒤척이며 시계를 봤다. 벌써 정오가 다 되어간다. 어린이날인데 어린이는 없고, 대신 '개린이'들이 있다.
"똘아, 신아, 생일 축하해."
담낭 점액종 진단을 받은 똘이에게 수제 간식도 줄 수 없는 이번 생일. 15년이란 시간 동안 우리 곁을 지켜준 똘이와 13년을 함께한 신이. 그들의 정확한 탄생일을 모르기에 어린이날을 생일로 정했다.
창밖으로 산과 강, 나무들이 여전히 그 자리에서 나를 반겨준다. "실컷 자고 일어났니?" 자연이 내게 인사를 건넨다. 기지개를 켜며 답했다. "그래, 오늘은 실컷 잤어."
존재 자체만으로 너무나 사랑스러운 동생과 통화를 했다.
" 예전에는 좋은 일이 생기면 불안했는데, 지금은 온전히 즐길 수 있게 됐어요."
동생의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마치 거울을 보는 듯했다. 나도 똑같았으니까. 좋은 일이 생기면 '왜 내게?'라는 질문부터 던지며 분석에 빠져들었다. 그럴 때마다 행복은 미끄러지듯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다.
연휴도 없이 근무했던 나에게 이번 휴일은 어릴 때 받던 종합선물세트 같다. 아들이 "엄마, 이번 연휴 쉬어요"라고 했을 때, 온몸의 피로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눈꺼풀을 누르던 납덩이같은 졸음이 날아가고 냉수마찰을 한 듯 정신이 맑아진다. 내게 찾아온 황금연휴를 즐기기 위해 늦은 밤까지 영화 세 편을 봤다.
'1923 경성을 뒤흔든 사람들'을 독서모임에서 읽은 후, '밀정'과 '암살'을 보니 책 속 인물들이 살아 움직이는 듯했다. 김원봉과 의열단원 김상옥의 이야기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영화 속 김상옥은 김장옥으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그의 결기는 그대로였다. 이름도 빛도 없이 희생한 독립투사들 덕분에 오늘, 이 평화를 누리고 있음에 감사한 마음과 동시 가슴이 먹먹해졌다.
다음 독서모임 책 '맡겨진 소녀'의 원작 영화인 '말 없는 소녀'도 감상했다. 영화가 끝나고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머릿속에 영화 장면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간다. 내게 찾아온 모든 일들, 그것이 좋든 나쁘든 너무 심각하게 분석하지 않기로 했다. 온전히 받아들이고 즐기기,. 괴테의 시처럼 '살아갈 날들을 위해...'
눈을 뜨니 똘이는 머리맡에, 신이는 발 밑에 있다가 쪼르르 와서 안긴다. 이 순간이 참 행복하다. 창밖은 어제와 똑같은 풍경이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내 시선은 달라졌다. 더 이상 '왜?'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그저 '지금'을 바라본다.
세상이 떠나갈 듯이, 누가 보면 미쳤다고 할 만큼 크게 웃으며 이 순간을 즐기리라, 존재 자체만으로 사랑스러운 똘이와 신이처럼, 나라는 존재만으로 충분하다. 온전히 즐기는 삶의 순간들. 분석하지 않고, 그저 흐르는 강물처럼 받아들이는 것.
어쩌면 행복은 복잡한 방정식이 아니라 아주 단순한 덧셈인지도 모른다.
같은 사람도 그날의 기분에 따라서 어떤 상황에 대한 반응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건 그 사람이 변덕스럽거나 나쁜 마음을 가져서가 아니라 그저 그날그날의 기분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는 분석하려고 가까이 다가가는 것보다는, 다음과 같이 생각하며 여유롭게 넘기는 게 좋습니다.
1. 그래, 그럴 때도 있는 거야.
2. 모든 걸 다 이해할 수는 없지.
3. 뭔가 다른 이유가 있겠지.
4. 오늘은 기분이 별로인가 보내.
5. 내일 이야기 나누는 게 좋겠다.
<김종원 작가의 살아갈 날들을 위한 괴테의 시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