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치에 앉아있었더니
최근 바쁘게 살아오다 보니 심신이 지쳐가는 것을 조금씩 느낄 수 있었습니다. 쉴 새 없이 쏟아지는 핸드폰의 연락, 각종 알람, 보내야 하는 메일, 지인들과의 만남 등. 삶의 모든 것들은 저의 에너지를 앗아갔고, 저는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욕실의 비누처럼, 조금씩 녹아 없어지며 말라붙고 있었습니다.
점점 있었던 일을 잘 기억하지 못하게 됐고, 밥을 먹을 때에도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지경이 되었죠. 사람들과의 관계도 조금씩 망가지고, 몸도 마음도 병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살면 더는 안 되겠다 싶어, 하던 일을 조금씩 그만두고 쉴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해가고 있었습니다. 집 앞 산책을 갈 때에도 핸드폰은 최대한 두고 나오고, 길을 걸어갈 때에도, 최대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걷는 그 순간을 느끼는 것을 목표로 삼았어요. 더 이상 어떤 정보도 머릿속에 넣지 않고자 하는 다짐이었죠. 머릿속은 손님이 오기 전, 방의 서랍처럼 꽉꽉 차 있어, 하나만 더 들어가도 터져버릴 듯했으니까요.
그렇게 몸과 마음을 조금씩 치료해 가던 중, 저에게는 작은 습관이 하나 생겼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카페에 가서 차가운 아이스 캐모마일을 하나 사 (저는 카페인 때문에 커피를 마시지 못합니다.) 빨대를 쪽쪽 빨며, 공원 앞 벤치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었어요. 그렇게 앉아 멍하니 내 눈앞에 펼쳐지는 녹색 배경의 광경을 보고 있노라면, 내가 마치 CCTV가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습니다.
담배 피우며 지나가는 아저씨, 왁자지껄 떠들며 지나가는 한 덩어리의 학생들, 유모차를 끌며 지나가는 아주머니 (가끔 유모차 안에는 강아지가 타고 있는 경우도 왕왕 있었습니다.) 등,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관찰자가 된 기분이었어요. 그들은 행복해 보이기도, 슬퍼 보이기도, 우울해 보이기도, 결의에 차 보이기도 했죠.
나의 표정은 그동안 어땠을까, 잠시 스스로를 돌아보기도 했답니다. 저는 어쩌면 이 시간을 명상처럼 활용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불필요한 생각을 그저 바라보고 날려 보내는, 요가 수행자들의 그 어떤 비슷한 말들과 비슷한 행동을 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렇게 일주일 정도가 지났을까, 제 옆에 어떤 할머니 한 분이 앉아 말을 걸어오셨어요. 자연스럽게 지어지는 미소에 어울리게 새겨진 주름과, 하얀 백발, 정겨운 눈웃음이 인상적인 어르신이셨죠. 나이는 몇 살인지, 하는 일은 무엇인지, 이런 개인적인 질문은 절대 하지 않으셨어요. 다만 젊은 사람이 왜 이곳에 노인처럼 앉아 있느냐 하는 것이 첫 질문이셨죠. 저는 어르신들만 벤치에 앉아있으리란 법이 있을까요라며 너스레를 떨었지만, 가볍게 미소를 지으시는 할머니의 모습은 어딘가 쓸쓸해 보였습니다.
할머니는 올해 101세가 넘으셨다고 하셨어요. 만 나이가 도입되고 얼마 전 생일이 지나 다시 100세이시라고 말씀하고 다니신다고 하시기도 했죠. 다만 100세가 되었을 때의 그 기분을 똑같이 느끼는 것은 싫어, 본인 스스로는 101세라고 생각하고 다니신다더라고요. 우리가 20살이니, 30살이니, 십의 자리가 바뀔 때 조금이라도 나이 드는 것이 싫어 어떻게든 내려보려던 그것이었는데, 어르신은 100의 자리가 바뀌는 경험을 하셨으니 그 무게가 얼마나 무거웠을지요.
어르신과 저는 따로 약속을 하지는 않았지만, 어느새 벤치에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친구 사이가 되었어요. 할머니의 살아온 얘기, 저의 힘들었던 이야기, 할머니의 가족 얘기, 저의 인생 고민 등 우리는 서로 다양한 주제의 대화를 나눴어요.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죽음에 관한 이야기였어요. 친구들도 가족도 다 떠나고, 이제 자신도 편안히 죽음을 맞이하고 싶은데, 이 몸뚱아리가 쉽게 죽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는 이야기였죠. 할머니는 정신과 몸이 굉장히 정정하신 건강한 상태이셨거든요. 그 말에는 제가 쉽게 웃지도, 어떠한 위로의 말씀을 해드릴 수도 없었답니다.
그렇게 저는 나이 차이가 70살 가까이 나는 좋은 친구를 얻게 되었어요. 아니, 어쩌면 좋은 스승이라고 해야 할 지도요. 100년이라는 시간 안에 녹아있는 인생의 경험과 삶의 지혜는 누구도 쉽게 따라 할 수 없는 것들이니까요. 삶의 여유를 갖고자 벤치에 앉아있었더니, 저는 100세 할머니와 친구가 될 수 있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