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채 녹지 않은 겨울산을 배경으로 산책 중이다. 이어폰을 타고 맑은 음악이 내 가슴을적신다. 오랜만에 들어선가 평소보다 더 달달하다.
스웨덴에서 열린 한강 작가의 문학강연을 들었다. 한마디도 놓치고 싶지 않아 듣고 또 들었다.
두 행 시에 담아낸 여덟 살 소녀 한강의 감성이 예순 노인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사랑이란 어디 있을까? 팔딱팔딱 뛰는 나의 가슴속에 있지.
사랑이란 무엇일까? 우리의 가슴과 가슴 사이를 연결해 주는 금실이지.'
'사랑' 함부로 사랑한다고 쉽게 내뱉었던 게 부끄럽다. 팔딱팔딱 뛰는 가슴으로너와 내가 금실로 이어진 듯소중하다 느낄 때 비로소 사랑한다고 말해야 할 것 같다.
24. 12. 9. mon
개명 허가판정을 받았다. 뭐라고 심장이 떨린다. 서운,허탈.. 뭔가 모를복잡한 감정이다.
스무 살이 되던 해에 부모님께서 오빠 이름을 새로 지어 오시면서 내 이름도 바꿔 주셨다. 교과서에 나올 법한 내 이름이 미운 이름이 아닌데도 당시에는 싫었던 모양이다.
돌이켜보면 지난 40년 동안 새 이름으로 바꿔 불려 오면서 이름 풀이대로 복되고 길한 기운이 내 삶에 스며든 것 같긴 하다. 남편이 농삼아 상위 1% 이내의 팔자라고 말하곤 하는데, 지금까지는 큰 고생 없이 평탄한 삶을 살아오고 있다. 이 복이 내 것이라 자만하지 않고 감사하며 겸손을 익힌다.
호적 이름과 불리는 이름, 두 개의 이름을 쓰면서 때때로 불편했었는데 죽어서 남길 이름을 하나로 정하고 나니 좋기도 하고 섭섭도 하고 만감이 교차된다.
단지 내 겨울 모과가 마치 배가 열린 거 같다. 오늘 하늘은 쾌청하다.
24. 12. 8 sun
어젯밤엔 엄마 주무시고 동생이랑 영화 한 편 보면서 피로를 풀었어요. 지난번에 재밌게 봤던 '클로즈'를 동생이랑 같이 봤어요(좋아하는 영화는 여러 번 보는 타입ㅎ)
'클로즈'는 23년에 개봉된 벨기에 영화인데, 예전에 재밌게 봤던 다르덴 형제 감독의 '자전거를 탄 소년'도 벨기에와 프랑스 작품으로 섬세한 감정선이 두 영화가 비슷합니다. 두 작품 모두 칸영화제 수상작이기도 해요.
격동의 한 주를 보내고 있는 중에 잠시 영화 한 편 감상하면서 시국의 피로감을 푸는 것도 괜찮은 거 같네요 ^^
24.12. 4 wed
어제 계엄령 선포되는 바람에 동생이 엄마 화장실 모시고 나오면서 잠깐 뉴스에 한 눈 파는 사이 크게 넘어지시는 사고가 있었어요.
다행히 정신도 맑으시고 한쪽 팔만 아파하시고 우려했던 거보다는 괜찮아 보여 하룻밤 재우고 오늘 정형외과에 다녀왔는데 어깨 탈골이 되셨다네요. 의사 선생님이 생각보다 쉽게 끼워주셨는데 다시 탈골될 수 있대요ㅠㅠ. 앞으로 조심조심 모셔야겠어요.
엄마가 70킬로 가까이 돼서 누워계신 엄마 휠체어에 태우는 게 젤 어려운 숙제였어요. 힘센 남편도움으로 잘 해결할 수 있었네요. 퇴직한 남편 의외로 쓸모가 많아요.ㅎ
엄마는 밤새 눈 말똥말똥 뜨고 거의 꼴딱 세우시더니 병원 가면서부터 졸음이 몰려오시나 봐요, 집 올 때 즈음 휠체어 앉은 채로 숙면에 빠지셨네요.
첨만 다행이에요. 엄마도 윤석열 끝장도.. ㅎ
탈골상태(좌)와 복원후(우)
24.12. 2 mon
산책 중입니다. 처마밑으로 눈이 바쁘게 녹아 떨어집니다. 또도독 또도독 똑똑..
눈이 오고 눈이 가고 24년이 오고 24년이 가고
오늘도 문재규 시인님의 시 한 편을 소개드립니다
ㆍ오고 가고ㆍ
사람들 오고 간다 한 사람 오고 한 사람 가고 또 한 사람 오고 또 한 사람 간다 다른 한 사람 오고 다른 한 사람 가고 또 다른 한 사람 오고 또 다른 한 사람 가고
한적한 하늘에서 햇살 한 줌 오고 햇살 한 줌 가고 바람 한 줄기 오고 바람 한 줄기 가고 한 구름 오고 한 구름 가고 달빛 하나 오고 달빛 하나 가고 별 하나 오고 별 하나 가고
쉼 없는 물결이 춤추다 가고 쉼 없는 파도가 왔다가 가고 새 한 마리 날아왔다 날아서 가고
담장 위 길고양이 살금 왔다 살금 가고 거짓말처럼 꽃 피고 꽃 지고 한 계절이 오고 한 계절이 가고
미국 이민살이를 힘들게 정리하고 한 친구가 돌아왔다 그리고 일 년쯤 지났을까 오늘은 고국에서 잘 살아 보겠다던 그 친구의 장례식장에 간다
밤, 검은 하늘에서 검은 비가 내린다
친구의 부음소식에 허탈한 심경을 담은 것 같아요.
단풍의 고운 빛깔이 채 가시기도 전에 서둘러 눈이 내렸어요. 눈 위에 떨어진 고운 잎들이 왠지 처연해 보입니다.
단풍이 오고 단풍이 가고...
24.12.1.sun
새벽 5시 반, 올해 마지막 달 12월을 열었습니다. 모닝 루틴을 끝내고 산책을 나갈까 하다가 어제 읽던 시집을 펼쳤어요.
문재규 시인의 '달을 물어 나르는 새'입니다. 이 분은 감사하게도 제 브런치 구독자님인데 이번에 두 번째 시집을 발간하시고 영상이 담긴 usb와 함께 선물로 보내주셨어요.
첫 번째 시집 '바람이 열어 놓은 꽃잎'은 간결한 시어로 섬세하게 이미지를 그려내셨습니다. 시 하나하나가 주는 감동이 매우 컸던 시집입니다.
이번 시집은 첫 번과 다르게 한 편의 수필처럼 이야기가 담긴 시들입니다. 뭉클하게 맘에 닿으며 잠시 멍하게 하는 시가 많습니다.
좀 짧은 시로 하나 소개 드릴게요.
ㆍ향기ㆍ
처음으로 아내가 장기 입원을 한 날
처음으로 세탁기를 돌렸다
처음으로 빨래를 건조대에 널었다
빨래 통에서 꺼낸 것이라곤
내 옷가지와 아내의 속옷뿐
띄엄띄엄 널린 두 사람의 빨래 사이에
떠나간 아이들이 있다
처음으로 집에서 다 마른빨래를 갰다
내 옷과 아내 옷 사이의 거리가 멀다
너덜거리는 레이스 실밥 터져 구멍 난 끝단
쨍한 햇볕에 바짝 말렸으나 흐물흐물하다
닳고 닳은 라벨을 보니 재래시장 점포 앞 매대 물건이 틀림없어 보인다
왼쪽 가슴 안쪽에서 주먹만 한 것이 덜커덩거렸다
그것들 처음으로
서랍장 안에 차곡차곡 넣는데
왜 내 안에 차곡차곡 쌓이는지 모르겠다
곁에 없는 아내의 향기가
온몸에 스며들고 있었다
시와 함께 고요하게 깊어가는 겨울을 보낼까 합니다.
24.11.30 sat
조용히 음악이 흐르는 거실, 늘 바라보던 창밖인데 겨울배경으로 바뀌었어요. 고요하고 차분한 겨울매력에 취하게 됩니다.
해가 뉘엿뉘엿한 시간이 되어 명상산책을 나왔습니다. 제 아지트에는 여전히 눈이 많이 쌓여 있어요.
눈 내리기 직전까지도 군데군데 곱게 피어있던 철쭉 덤불 위로 두터운 눈이불이 덮여 있어요. 따뜻해서 봄인 줄 알고 피웠던 꽃들이 예고 없이 들이 닦친 겨울을 어떻게 감내하고 있을지 염려스럽네요.
선사 움막집이 이글루가 되었어요. 고대 마을의 겨울풍경이 이랬겠구나 하고 상상해 보니 재밌네요.
오늘도 하늘이 형언할 수 없도록 아름답습니다.
거실 창밖 풍경
아들방 창밖 풍경
이글루가 되어버린 선사 움막과 눈이불을 덮은 철쭉
24.11.29 fri
오늘은 남편과 아버지, 오빠한테 다녀왔어요. 아버지 생전에 좋아하시던 '꽃'다발 들고요.
오빠가 남편과 저의 오작교입니다. 남편은 오빠 대학 동기예요. 저보다 스무살이나 젊은 나이에 서둘러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아버지, 오빠에게 가는 길은 아름다운 바닷길을 건너가요. 눈이 내리고 한쪽에선 구름 사이로 햇살이 내리비치는 바다풍경은 신비로움 그 자체였습니다.
이틀간 내린 폭설로 커다란 소나무가 뽑히고 여기저기 가지들이 부러진 째 널브러져 있었습니다. 다행히 아버지, 오빠가 계신 소나무는 다치지 않았어요. 나무 주위를 둘러 심은 맥문동에 눈이덮여 있길래손으로 털어 내었습니다. 오늘따라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이런저런 얘기를 풀며 인사를 드렸어요.
바로 옆 구봉도에 들러 해안가 산책을 했어요. 그 순간 햇살이 눈부시도록 쨍하게 바닷물을 비추었습니다. 영롱하다는 게 이런 거구나 싶었어요.
돌아오는 길에 전에 갔던 칼국수 집에 다시 들렀어요. 전망도 좋고 맛도 좋았던 기억이 있었거든요. '포도밭할머니' 명칭이 특이해서 저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지만 남편이 정확히 이름을 기억해 냈어요^^
트리 장식에 캐럴송이 은은하게 흐르는 곳에서 바지락칼국수와 파전, 동동주(저만)로 미리크리스마스 건배를 했습니다. 칼국수도 맛있지만 파전도 도톰 바삭 기막히게 맛있었어요. 대부도 들르시면 한번 방문해 보세요^^
오늘은 그야말로 눈부시게 행복한 하루였습니다.
('히로인스'라는 운동앱에 올린 일기글을 추려서 5~7편씩 연재하고 있습니다. 일기에서 지칭하는 히팸은 히로인스 가족을 의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