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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서희 Dec 28. 2016

언젠가 가겠지 푸르른 이 청춘..

<사랑 후에 오는 것들>- 츠지 히토나리


간만에 심쿵한 로맨스 한 편을 읽었다. 청춘이라 불리는 그 시절의 이야기를..


 '언젠가 가겠지 푸르른 이 청춘..'


가수 김필이 김창완의 <청춘>을 리메이크해서 구슬프게 잘도 불렀다. 원곡으로는 느낄 수 없었던 감성이 가슴 깊이 요동 쳤었다. 중간에 삽입된 김창완의 목소리에 향수 어린 정겨움이 더해져 완벽한 하모니를 이루기도 했다.


 '언젠가 가겠지 푸르른 이 청춘..'

 이 소절에서,

 '네.. 가더라고요.. 청춘..'

고 대답하면서 조금은 서글퍼지기도 했다.



 <사랑 후에 오는 것들>, 이 책도 얼마 전에 읽은 <사랑의 기초>처럼 두 나라, 두 작가에 의해 이색적인 구상으로 출간되었다. 물론 두 권의 책이 하나의 소설이라는 점에서 <사랑의 기초>와는 완전히 다른 프로젝트이긴 하다.


<사랑 후에 오는 것들> -츠지 히토나리 / 공지영


이 소설은 2005년 한일 우호의 해를 맞아 일본인 작가 츠지 히토나리의 제안으로, 한국의 유명 작가 공지영과 공동 제작된 소설이다. 히토나리는 한일 간의 서먹하고 불편한 관계가, 그가 그린 남녀의 사랑을 통해 좁혀지기를 고대하며 이 소설에 열정을 담았던 것 같다.


츠지 히토나리는 <냉정과 열정사이>의 저자이기도 하다.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동기도 그가 내가 좋아하는 영화 <냉정과 열정사이>의 작가이기 때문이었다.


영화 <냉정과 열정사이>


그는 묘사력이 좋은 작가였다. 그리고 섬세했다. 소설의 주인공 준고가 바라보는 모든 광경이 내 눈을 통해 고스란히 들어왔다. 그리고 쉽게 준고의 모습으로 녹아들어 마치 내가 준고인 양 맥박도 준고와 함께 뛰는 듯했다. 준고가 표현한 그의 연인 최홍의 모습 또한 좀 철이 없긴 하지만 매력적인 여인이었다. 그의 실연의 아픔을 잊게 하기에 충분하리만큼..


상공에서 내려다본 서울야경..히토나리가 반도체칩으로 표현한 바로 그 모습을  준고의 눈으로 나도 바라 보았다. -제주여행에서 돌아오면서 서울 상공에서 촬영한 모습


공지영 작가에겐 죄송하지만, 츠지 히토나리의 책을 먼저 읽었던 건 정말 다행이었다. 공지영 작가의 책을 먼저 읽었더라면 어쩌면 츠지 히토나리의 책은 열어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히토나리가 그린 기대했던 홍이의 모습이 공지영 작가의 홍이 모습에서 많이 실망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기도 하지만 일본인 남성 작가와 한국인 여성 작가가 함께 머리를 맞대어 완성한 작품이기에

어쩌면 그래서 좀 더 현실적일 수는 있는 것 같다.

가장 일본적인 남자의 정서와 한국적인 여인의 정서가 자연스레 준고와 홍이에게 스며들 수 있기 때문이다.


공지영 작가가 그린 모습이 최홍의 본모습인데, 준고에게는 그녀가 이국적이고 그래서 어쩌면 더 사랑스럽게 느껴졌을지도.. 준고의 눈에 비친 홍이의 모습은 그렇게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홍이는 준고에게 윤동주의 시집을 선물한다. 단순히 선물을 넘어 일본인 친구에게 윤동주란 한국의 아름다운 시인을 알리고, 한일 간의 곪은 뿌리를 느끼게 해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 윤동주 '쉽게 씌여진 시' 중에서


준고의 영혼을 흔든 시구이다.


'자신을 죽인 나라의 후예인 나의 마음에 시인의 생생한 사고의 비가 조용히 내렸다.'


자신을 마치 '카인의 후예'처럼 죄지은 자의 후예로 낮추는 이러한 준고의 생각에서, 억울하게 꺼져간 시인의 혼 앞에 일본인으로서 깊이 속죄하는 준고의 모습이 오롯이 느껴지는 듯했다.


문득 까마득하게 오래전, 내가 십대였을 때 한 팔 친구가 보내온 윤동주 시집이 떠올랐다. 꽤 오랫동안 수십 통의 편지를 주고받으며 가까워진 친구였다. 이 친구는 늘 편지 끝에 털이 뽀송뽀송한 양 한 마리를 그린 후 그옆에 Hee를 붙여 날 칭하곤 했는데, 당시 나의 원래 이름인 영희를 그렇게 '양'희로 칭한 것이라는 생각이 이제와 비로소 들었다.

영화 러브스토리드의 한 장면이 있는 카드엔 '탄생일을 축하하며 삼가 사랑하는 Hee에게..' 라고 쓰여 있었다. 열아홉 남학생의 수줍은 고백과 또 이성으로부터 처음 듣는 '사랑'이라는 단어에 심쿵했을 나를 생각하니 빙그레 웃음이 지어졌다.




난 공지영 작가의 책을 읽고 실망되었던 감성을 되찾고자 츠지 히토나리의 책을 다시 한번 더 읽었다. 간간히 공지영 작가가 쓴 홍이의 추억, 즉 준고와 같은 추억이 담긴 페이지를 들춰 보면서..  이 책은 두 작가가 각각 일본인 준고 입장에서 또 한국인 홍이 입장에서 같은 추억을 되새기며 썼지만, 히토나리의 제안으로 시작된 소설이기에 아마도 그의 열정과 뜻이 더 크지 않았나 싶다.


공지영 작가님의 글에서도 가슴 깊이 동요를 일으킨 대목이 있었다. 바로 홍이의 아버지와 그의 팬이었던 시즈코와의 절제된 사랑 이야기이다. 무수한 세월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포장마차에서 소주잔을 앞에 놓고, 딸에게 가슴속 이야기를 조심스레 풀어내는 아버지의 모습이 오래도록 여운이 남는다. 어쩌면 준고와 홍이의 사랑 이야기보다 더 가슴이 저려왔던 것도 같다.



20대 연인의 모습을 보니 내 청춘의 기억이 되살아 났다. 홍이와 준고가 오르는 남산타워를 나도 20대 때 설레는 맘으로 올랐었다. 그땐 차도 없이 용산에서 이태원을 통해 남산에 오르고 다시 용산에 내려와서도 헤어지기 싫어 서부이촌동 쪽으로 더 돌아 서빙고까지 걸어 다녔다. 그렇게 기나긴 겨울밤을 밤새 걸었었다. 솔직히 남산이나 주변 풍경에 대한 기억보다는 상대에 대한 내 마음만  남아있다. 함께인 것만으로 마냥 좋았다.


'내 젊은 연가가 구슬퍼..'


그렇게 푸르렀던 내 청춘도 세월 따라 가고 마는 것이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누군가의 청춘도 그렇게 갔을 것이고 나보다 젊은 그 누군가의 청춘 또한 언젠가 가겠지..


나이가 들면 드는 대로 또 그만큼의 삶의 의미가 주어진다. 비록 청춘은 갔어도 그 젊은 날의 기억이 잊히지 않고 향수가 되어, 가슴 한편에 남아 문득 이렇게 꺼내어지는 것이다.

추억은 그렇게 세월의 덧없음을 충분히 위로해주는 듯하다.

 


다행히 이 소설은 해피엔딩이다. 요즘처럼 시끄럽고 우울한 겨울에, 이런 로맨틱한 소설 한 권쯤 읽으면서 마음을 순후하게 정화시켜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https://youtu.be/jqZ2Ie4pd30

청춘 - 김필,김창완 <응답하라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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