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팀장

6. 빨간펜을 가슴에 묻는다.

by 오얼 OR

2001년에 제대했으니까 이제 만 17년이나 지났다. 사단 참모부에서 행정병으로 일했었는데 제대 후 늘어난 게 있다면 타자 수? 일거고 망가진 게 있다면 사람에 대한 믿음과 변덕스러운 꼰대들에 대한 혐오 뭐 그런 거 였던 것 같다. 2년이 좀 넘는 시간동안 악필인데 컴퓨터도 못하는 두 명의 참모를 모시면서 지긋지긋한 글자 해독과 글짓기가 계속 되었다. 워드를 쳐서 보고서를 갖고 가면 야근하라며 놓고 가는 보고서에는 빨간 수성펜 글씨가 가득했다. 그런 상태로 2년이 지나 취업을 했다. 이직과 승진과 새로운 업무를 맡는 일을 반복했지만 그 중 하이라이트였던 상사는 '깐돌이'라고 불리던 물류회사의 총괄팀장이었다.

독점인 회사였는데 지금도 돈은 잘 벌고 있다. 조직문화랄 건 없다. 그냥 까라면 까고 돈을 많이 버니까 즐거운 회사였다. 내가 다니는 3년의 시간동안은 더더군다나 호황이어서 인센티브에 여름 휴가비에 명절 보너스에 기타 등등 그 나이치고는 벌이가 괜찮았다. 근데 사람들은 너무 힘들었다.

선배들이 안하겠다고 내뺀 자리에는 신사업기획이었고 영업관리직이었던 나는 내 일도 다른 사람과 나누지 못한 채 전공과는 매우 거리가 먼 CAD에 일본/미국 물류 잡지를 독파해 가면서 새로운 물류용기 개발에 세월을 보냈다. 술만 마시면 자신의 학력 컴플렉스를 언급하며 대로가에서 머리를 박게 하고 손지검을 일삼던 그 팀장은 나중에는 명퇴 당해서 어느 동네에서 빌리지버스 운전을 하고 있다고 하지만 정말 워드 한 자를 안 치고 빨간 펜질을 하시는 분이었다. 하고 싶은 일도 아니었지만 혼자 앉아서 하는 야근도 주말근무도 그리고 무엇보다 팀장도 어디로 갈지 모르는 회장님이 찾아오라는 답도 나에게는 짐이었다. 회사 다닌지 4년차인데 그런 일을 해야 하는지도 이해가 안갔다. 지금으로 치면 뭣도 모르는 나였는데. 물론 그 말도 안되는 경험? 경력 뭐 그런 거 때문에 나는 나중에 더 큰 조직에서 신사업팀을 통합해 사업기획팀장이 되기도 했다.

어제 외근을 나왔는데 구성원 하나가 카톡으로 징징대서 전화를 걸었다. 고객이 원하는 자료는 못 만들겠다고 자신의 한계라며 어떻게 하냐고 계속 나에게 물었다. 구성원을 육성하려면 계속 도전과제를 주어야 한다고 하지만 나도 나이가 먹었는지 요즘 애들하고 일하려면 계속된 도전과제가 큰 의미를 준다는 생각은 안하게 된다. 일을 안 가르쳐 주면 안 가르쳐 준다고 배울 게 없다고 하고 일을 가르쳐 주면 힘들다고 하고 과제를 내 주면 노력은 하는지 안하는지 모르겠지만 금새 모르겠다고 하고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나도 점점 육성이라는 게 뭐 큰 의미가 있을까 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나도 팀장되면 빨간펜을 꺼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빨간펜은 고사하고 팀원이 징징대던 자료를 만드느라 휴일 하루를 날려버렸다.

이제 인력육성이라는 HRD를 한 지 만 10년이 한 달 더 넘었다. 10년 동안 수 없이 체계를 세우고 바꾸고 과정을 만들고 운영하고 강의를 하고 사업을 벌리고 기획을 하고 담당자로 컨설턴트로 열심히 지냈는데 두 달 전까지도 리더십 강의를 하던 나는 강단에서 나와 같은 입장의 팀장들에게 현실은 그렇지 않다고 꼭 이야기하는 습관이 생겼다. 대기업의 팀장은 진급을 하던 스카웃을 받건 2~3년 안에는 아니 1년? 안에는 뭔가를 보여줘야 한다. 꼭 임원이 되기를 바라지 않아도 생존을 하려면 방법이 없다.

인재를 육성한다고 고마워하지도 않는 구성원들을 붙잡고 이야기하고 가르쳐 주고 확인하는 과정도 실행할 여력은 별로 없다. 신임 팀장이 되면 팀장 리더십을 강의하는 사람들 모두 다 R&R(역할과 책임)을 말하고 인재육성과 직무 로테이션, 코칭, 커뮤니케이션 등등 여러 요소들을 이야기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걸 지키기는 어렵다. 쉽지 않다가 아니라 어렵다. 그런데 예전처럼 강압적인 분위기도 먹히지 않아서 헐크와는 반대로 마음 속만 폭군으로 살아가기 일쑤다. 소주 한 잔 마시면 욕하고 싶지만 취할 만하면 팀원들 눈치를 보면 빠져줘야 하고 마음 속에 있는 이야기를 하고 나면 열 중의 한 둘을 제외하고는 등을 돌린다.

빨간펜은 팀장 진급 선물로 받았는데 퇴사할 때 서명용 펜으로 써야 할 판이다.

요즘은 과거와는 달리 신임 팀장 중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찾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그러다 스트레스 받고 탈모 생기고 그 보다 더 넘어가면 우울증 약을 먹기 마련인데 생각보다 리더가 되고 싶지 않은 사람도 많고 먹고 살라고 보니 원하지 않는 착한 리더가 되는 사람도 있다.

과거에는 팔로워십도 강조했다. 지금은 잘 모르겠다.

얼마 전 찾아온 친구에게 이런 얘기를 들었다.

대표이사가 팀장들에게 "느네들이 그렇게 애들을 괴롭히니까 조직 분위기가 이 모양이지. 서로 웃으면서 일하는 분위기를 만들어."라고 했단다. 구성원들이 징징대는 얘기는 들어주면서 팀장은 중간에 치이는 존재로 전락해 버린 건 아닌지 회의가 든다고 했다.

"우리가 그런 나이야."라고 하고 커피 한 잔 사고 보냈는데 나 역시 마음은 씁쓸했다.

팀장 참 오래하고 있었다. 나도 한 단계 더 올라온지 얼마 안 됐으니 만 4년 넘도록 팀장 자리에 있었다. 지금도 역할은 변하지 않았지만.

진급할 때 가슴에 품었던 빨간펜은 쓰지 못하겠지만 오랫동안 실무형 리더로 일해야 할 것 같은 시대의 흐름을 직감하면서 새로운 검은펜을 사야할 것 같다.

나도 깐돌이는 아니더라도 맞은 놈이 때리고 싶어한다고 마음 속으로는 깐돌이처럼 됐으면 하는 보상심리가 있었나 보다. 근데 지금은 그 반대로 열심히 뛰어도 좋은 소리는 못 듣는 시대 상황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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