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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뼘소설]앵콜요청금지

BGM 브로콜리너마저 - 앵콜요청금지

헤어질 때의 우리는 다른 연인과 다를 것이 없었다. 도대체 나를 사랑하기는 하는 거냐고 묻다가, 왜 이해해 주지 못하냐고 소리를 질렀다가, 이렇게 계속 만나도 되는 것이냐고 한숨을 뱉다가, 서로를 위해 헤어지는 것이 좋겠다고 서둘러 만남을 종결지었다. 한동안 허전하고 애통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녀가 유기한 추억도 서서히 힘을 잃어갔다.   


나는 군대 동기가 소개해준 녀석의 여동생과 두 번의 저녁 식사를 했고, 중학교 친구가 마련한 술자리에서 보습학원 강사와 러브샷도 했다. 그러나 그녀들은 차기 연애 상대가 되지 못했다. 군대 동기의 여동생은 '미안하지만 인연이 아닌 것 같다'는 말로 연락을 끊었고, 내 목을 끌어안고 러브샷을 했던 학원강사는 주사가 심했다.   


그녀들과의 만남이 어그러지자, 문득 석 달 전에 헤어진 그녀가 떠올랐다. 하지만 새로 만난 여자 때문에 옛 애인에게 전화질이나 하는 지질한 남자는 될 수 없었다. 


그런데 그녀가 불쑥 찾아왔다. [서프라이즈]가 끝난 일요일 오전, 떡라면을 끓여 막 식탁에 올려두던 참이었다. <잠깐 볼까?> ‘알 수 없음’님이 보낸 메시지였지만, 단박에 그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너무 짧다. 예전 머리가 훨씬 예쁜데. 자기는 덥수룩한 게 어울려."  

  "더워. 그런데... 왜 온 거야?"  

  "보고 싶어서 찾아왔지, 왜는 무슨."  


그녀는 오렌지색 립글로스를 반짝이며 입을 삐죽거렸다. 그리고 망고 바나나 프라푸치노를 쪽쪽 빨아 당겼다. 재수없는 망고 바나나 프라푸치노. 그녀는 커피를 싫어했다. 대신, 언제나 망고 바나나 프라푸치노를 ‘처’ 찾았다. 키위주스나 딸기주스처럼 외우기 쉬운 음료를 좋아하면 좋겠는데, 왜 그리 길고 어렵고 얄궂은 이름의 음료를 좋아하는 것인가, 나는 친절하고 귀여운 아르바이트생 앞에서 ‘프라푸치노’를 버벅거릴 때마다 속으로 욕을 해댔다. 속좁게. 처음 만났을 때는, 즐겨 마시는 음료도 어쩌면 이렇게 노랑노랑하고 망고망고하고 귀여울까! 두 손 모아 감탄했으면서.  

  

"보고 싶으면 막 보고, 그럴 사이 아니잖아."  

"일요일이잖아. 날씨도 좋고... 밥은 먹었어?"  

"떡라면 끓여서 한 젓가락 하던 참이었어. 덕분에 싱크대에서 무럭무럭 불어 터지고 있을 거야."  

  

그녀는 불어 터진 라면처럼 말끝마다 퉁퉁거리는 나를 말끄러미 바라보았다. 또 저런다. 또. 세상에서 가장 너그럽고 인자한 수녀님 눈빛으로 똥오줌 못 가리는 꼬마 조카를 바라보듯 또.  

  

"우리, 다시 시작하자."  

  

그녀가 말했다. 동시에 나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비가 올 것 같았다. 석 달 전에 헤어진 여자가 다시 시작하자고 찾아온 일요일 오후, 비가 온다는 예보는 없었는데. 


솔직히 말하면, 그녀와 다시 만나길 바란 적도 있었다. 헤어지고 일주일쯤 지나자 끼니마다 그녀가 몰려왔었다. 밥은 먹나? 또 망고 바나나 뭐시깽이만 마시고 있나? 다른 남자가 생긴 것은 아닐까? 그놈은 뭐하는 놈일까? 그놈이랑 잤겠지? 나보다 잘하나? 퇴근 후의 시간은 못 견디게 더디고 허전했다. 오늘 저녁엔 뭐하나? 잠도 안 오고, 더 이상 술은 싫고. 학원강사를 소개해준 녀석이 ‘다른 애로 해줘?’ 포주처럼 능글거리는 것도 밉상이었다. 됐어, 인마. 짜장면이나 사.   

  

"있지, 나는 정말... 헤어지고 싶진 않았어."   

  

그녀는 진심을 보여주고 싶은 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얼음을 건져 천천히 씹었다. 침묵이 흐르는 테이블 위로 아그작 아그작, 얼음 씹는 소리만 요란했다.   

  

그녀는 예쁘고 똑똑한 여자였지만, 동지애가 부족했다. 내가 꿈꾸던 연애는 ‘동지애가 투철한 만남’이었다. 삐끗하거나 무너지려 할 때, 단단하고 야무진 손으로 찰싹! 등을 때려주고 고단한 삶을 함께 뛰어주는, 내가 이끌거나 그녀가 이끄는 형국이 아니라 완주를 위해 손을 잡고 함께 뛰는, 동지애가 펄펄 끓는 그런 관계. 이미 시상식도 끝나고 뒤처리를 마친 행사 관계자들까지 떠나버린 결승점이라도 꾀죄죄한 서로의 얼굴을 닦아주며 ‘그래도 끝까지 함께 왔다’ 기뻐하는 관계. 나 역시 그런 남자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달랐다. 내가 다져 놓은 울타리 안에 안착하길 원했다. ‘네가 얼른 뛰어가 자리를 맡아 놓으면, 난 우아하게 걸어가 앉을게.’라고. 그래서 그녀가 불편하고 부족하다는 듯 찝찌름한 표정을 지을 때마다, 지은 죄도 없이 마음이 무겁고 불안했다. 그녀를 만족시키지 못하는 내가 한심했다. 그렇게 서서히 자존감이 떨어지다 보니 어느 순간 나는 닳아빠진 채 그녀의 눈치를 살피고, 그녀의 컨디션을 챙기고, 그녀의 기분을 맞추며 일 년을 허비하고 있었다. 그것은 결단코 연애가 아니었다. 나는 그녀가 책정해 놓은 이상형의 림보를 통과하기 위해 뒤집어진 거북이처럼 허우적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우리가 헤어진 이유는, 다시 시작할 수 없기 때문이야."   

"왜? 같은 이유로 또 헤어질 것 같아서?"  

"아니. 네가 바라는 남자는 내가 되고 싶은 내가 아니라서."  

  

동그란 눈으로 쳐다보던 그녀가 이내 시무룩한 표정으로 망고 바나나 프라푸치노를 마셨다. 더 매달리는 것은 시간낭비라는 것을 체감한 것 같았다. 역시 그녀는 스마트했다. 사실 그녀는 내가 다시 시작하자고 할까 봐 겁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다시 시작하고 싶어 찾아온 것이 아니라, 다시 시작하자는 그녀를 껴안고 감격에 겨워하는 나를 통해 본인이 얼마나 사랑스러운 '연애의 갑'인지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다.   

  

얼마 남지 않은 커피를 깨끗하게 비워냈다. 얼음이 녹아내린 아메리카노는 보리차처럼 연해지고 말았다. 진짜 헤어질 시간이 온 것이다. 이제 그만 일어날까? 내가 엉덩이를 들썩거리자,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빈 머그컵을 반납하고 빗방울이 떨어지는 거리로 나왔다. 우리가 가지고 있던 재회 쿠폰의 유효기간은 오늘까지. 나는 원룸이 있는 좌측으로, 그녀는 전철역이 있는 우측으로 야무지게, 깨끗하게 안녕을 고할 시간이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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