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님의 임종

# 코스母스 3화

by 서기선

할머님의 임종


할아버님과는 다르게 할머님의 치매는 너무 조용한 치매였다.

할아버님처럼 대소변을 가리지 못할 정도는 아니셨다. 다만 말씀을 못하셨을 뿐 기본적인 생활은 가능하셨다. 돌아가시기 1달 전까지만 해도 그러셨다.

양화점을 하기 전 그러니까 우리 식구가 서울에 처음 올라와 자리 잡기 전에는 할머님과 어머님이 경동시장에서 고사리와 도라지 같은 나물을 판매하셨는데 두 분이 함께한 시간이 길어서였는지 할머님과 어머님은 눈빛으로도 대화가 가능한 듯 보였다.

할머님께서 풍을 맞으신 후부터 한쪽 팔다리를 사용하지 못하셨고 말씀 또한 못하신다.

하지만 어머님은 할머님께서 어떤 이야기를 하시는지 굳이 대화하지 않아도 잘 알아들으셨고 그때마다 할머니는 고개를 까딱 거림으로 맞다 와 아니다 를 표현하셨다.

너무 신기한 내가 어머님께 물어보았지만 어머님도 당신께서 어떻게 알아차리는지 알지 못하신다고 하셨다.


[엄마! 엄마는 할머님이 무슨 말하는지 알아요?] [몰라 모르겠는데] [그러면 어떻게 할머님이 요강이 필요한지 알고 가져다 드리는 거예요? 다른 걸 수도 있잖아요] [엄마눈에는 그렇게 보이던걸 요강이 필요하다고] [에이 말도 안 돼]


아마 함께한 시간이 만들어준 능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님께서 중풍이 오기 전에는 옛날이야기도 곧잘 해 주셨는데 대부분 빨리 잠들라는 아주 지루한 이야기였다.

[뚝 떨어지면 풍덩]이라고 한 시간이 넘도록 우물옆 큰 감나무에서 떨어지고 있는 감나무 이야기라던가 몇 시간째 자신이 숨겨둔 도토리를 찾고 있는 다람쥐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던 할머님께서 임종 전에 어머님께 한 말씀하고 돌아가셨는데 그 말씀 때문에 어머님은 내내 가슴 아파하셨다.

[어멈 고생했다, 그리고 고맙다.] 고생했다, 그리고 고맙다는 말 한마디가 그간의 노고에 대한 보상이 되지는 않았겠지만 어머니는 그것으로도 감사해하셨다.

내가 살던 월곡동엔 당시 또래의 학생들이 너무 많아서 오전 오후반으로 나누어 학교운영을 해야 할 정도였다.

지금이야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이야기이지만... 내가 태어난 1971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아동이 태어난 해 이기도 했으니 오전 오후반이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할머님이 돌아가시던 날 나는 오후반이었는데 학교에 가려고 준비 중인 나에게 어머님께서 오늘은 학교 안 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영문도 모른 체 학교를 안 가도 된다는 말에 마냥 좋아했지만 할머님의 임종을 지켜봐야 했던 충격적인 날이기도 했다.

[오늘은 학교 안 가는 게 좋겠다 오늘은 할머님 하고 있자] 집에서 가계 까지는 그리 멀리 있지 않았다.

전화를 하면 되겠지만 양화점에는 전화가 있었지만 우리 집 에는 전화가 없었기에 어머님께서는 손수 아버지를 모시러 다녀오겠다고 하시며 바삐 나가셨다.

얼마 후 두 분이 함께 오셨는데 표정이 그리 밝지 않으셨다.

[큰 집하고 작은집 고모들에게도 연락을 해야겠어요.] [내가 하고 올 테니 당신은 어머님 곁을 지켜요] 하시며 아버님이 다시 양화점으로 돌아가셨다.

아버님이 할머님과 잠시 계시다 양화점으로 가셨고 어머님과 나는 할머님 곁에 앉아있었다.

할머님은 호흡이 약하셨는데 색색 하는 숨소리로 살아계심을 짐작할 만큼 상태가 좋지 못했다.

중풍으로 말씀을 못하시던 할머님 이신대 울고 있는 어머님에게 힘겹게 손짓을 하셨고 어머님이 할머님 곁에 앉자 머리를 자신의 입 쪽으로 끌어당기시더니 무러라 말씀을 하시는 듯했다.

순간 ‘어라 할머니 말씀 못하시는데 이상하네’라고 생각만 했을 뿐 내용이 궁금하지는 않았다.

어머님은 임종 전 할머님의 목소리를 들으셨는데 [고생했다, 그리고 고맙다]라고 한 말씀만 하셨단다.

할머님의 [고생했다]라는 말 한마디에 어머님은 오열하셨고 평생 잊지 못할 말이라고 하셨다.

연락을 마치신 아버님께서 오셨지만 할머님은 아버님에게는 아무런 말씀을 하지 않으셨고 다만 손을 잡고 있는 아버님을 보면서 눈물만 주르륵 흘리셨다.

엄마도 아빠도 함께 울고 계셨는데 곁을 지켜보던 나에게 아버님이 할머님에게 인사하라고 손짓하였지만 날 부르기 위해 고개를 돌리던 그때 할머님이 돌아가셨고 아버지모습 뒤로 마지막 할머님의 임종을 지켜보았다.

나는 울고 있었지만 할머님의 임종이 슬퍼 울기보다는 어른들이 울고 있었기에 덩달아 슬퍼했다 그만큼 나는 어렸었다.

내가 할머님의 임종을 받아들이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안았지만 그때는 이미 마음이 단단해진 후였기에 그때만큼 슬프지는 않았다.

할머님이 먼저 돌아가신 후 이듬해 할아버님마저 임종 셨지만 작은 아버님은 참석하지 않으셨다.

다른 지인들 역시 저마다의 사연으로 참석하지 못한 친인척들도 더러 있었지만 특히 아버님은

작은아버님을 이해하지 못하셨다.

아버님은 한동안 모두 용서하지 않겠노라고 말씀하셨지만 아버님의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을 잘 아시는 어머님의 중재로 얼마 가지 않아 다시 평점심을 찾도록 도와주셨다.

막내 작은 아버님에게는 아들과 딸 이 있었는데 임종당시 사업실패에 와 이혼등의 이유로 술에 의존한 체 패인이나 다름없을 만큼 만신창이가 되어 자신의 삶을 낭비하고 있었다.

보다 못한 아버님이 자립할 수 있도록 지원하셨지만 이미 정신적으로 삶에 의지가 없었던 작은아버님은 술에 취해 허성세월을 보내고 계셨다.

아버님은 또 다른 이유로 큰 아버님을 오랫동안 용서하지 않으셨는데 가장 큰 이유는 돌아가시고 난 후 당신의 종교관을 이유로 제사를 모지시 않겠노라 말씀하셨기 때문이었다.

고모 두 분을 제외하고 나면 큰 아버님이 장남이지만 스스로 권리를 아니 간병이라는 짐을 떠넘긴 것도 모자라 제사조차 지내지 않겠다는 등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행동으로 빈축을 사셨으며 형제로서의 도리마저 저버렸다고 판단한 아버님은 한동안 큰 아버님을 찾지 않으셨다.

3남 2녀 중 작은 고모만이 최소한의 도리를 하셨는데 당연한 것이지만 아버님은 그런 당연한 도리를 지켜오신 고모님과는 아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셨고 이후에도 고모님 일이라면 언제나 앞장서 돕곤 하셨다.

어렸을 때부터 유난히 돈독했던 이유도 있었지만 다른 형제들의 행동이 워낙 실망스러웠던 탓에 가장인간미 있었던 고모님이 고마웠을 것이다.

물론 큰고모님도 장례식엔 참석하셨지만 평소 왕례가 없었던 탓에 잠시 머물다 가셨을 뿐 이후에도 관계를 지속하기 위한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으셨다.

몸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던 옛이야기에 100% 공감할 수 있었다.

우리 집은 무교이다.

처음부터 종교가 없지는 않았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가족 모두가 특별한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아버님이 평소 입버릇처럼 하셨던 말씀이 넘치면 모자라니만 못하다였는데 지난 할아버님 장례식을 통해 알게 되었다.

두 분 모고님은 서로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었다.

두 분 고모는 세계관부터 가치관 이념등 너무나도 큰 차이를 보이셨다.

청주에서 목사님으로 살고 계신 큰 고모님은 강원도에서 신내림을 받은 작은 고모님을 사탄 마귀라며 굉장히 싫어하셨고 작은 고모님 역시 당신을 싫어하시는 큰 모고님을 포용하지 않으셨다.

할머님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던 분들이 할아버님 장례식날엔 모두 참석하셨다.

할아버님 장례식날 산소에 모인 두 분의 고모님은 당신들이 방법으로 추모를 하셨는데 그 모습에 아버님께서 크게 화를 내셨으며, 종교에 관한 중립적인 입장을 표명하셨고 그때부터 우리 가족은 종교에 관한 어떠한 입장도 말히지 않았다.

할아버님의 산소에서 찬송가를 부르기 시작하던 큰고모님이 방언기도라는 것을 하셨는데 다른 나라의 언어 같기도 했고 동물의 울음소리 같기도 한 알 수 없는 소리들을 1시간은 하신 듯했으며 그런 큰고모님을 지켜보던 작은 고모님이 지난번 자신을 향해 사탄이니 마귀니 했던 말을 고스란히 돌려드렸고 큰고모님의 기도가 끝이난 후 작은 고모님의 의식 또한 만만치 않았다.


[이놈의 집구석 잘 돌아간다. 꼭 이래야만 하는 거야! 엄마, 아빠가 누나들 모습을 보면 뭐라고 하겠어? 어떻게 사람들이 그러냐? 계속 이럴 거면 앞으로는 찾아 오지도마! 허긴 엄마, 아빠 계실 때에도 찾아오지 않던 사람들인데 내가 뭘 기대하겠니 그냥 우리 각자 알아서 삽시다]


아버님은 울분을 토로하셨고 그간의 서운함을 이야기하셨으며 이날 두 분의 모습을 통해 평소 자주 하시던 넘치면 모자라니만 못하다는 말씀을 또 한 번 두 분에게 하셨지만 두 분 모두 아버님의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으셨다.

그렇게 쓸쓸하고 이상한 장례식이 마무리되었지만 가족들 간 아직 풀지 못한 실타래가 남아 있었다.

그런 실타래를 풀기 위해 어머님의 중재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먼저 사업실패와 이혼으로 스스로의 삶을 포기한 체 술에 취해 살아가고 있는 작은 아버님을 포용하셨다.

매번 식사를 챙겨드리고 용돈을 주셨으며 항상 용기를 북돋아주셨다.

그렇게 자립할 수 있도록 응원을 아끼지 않으셨고 이런 어머님의 노력은 당신께서 임종하시기 전까지 계속되었지만 끝내 자립하지 못하신 작은아버지는 지금도 패인처럼 사신다.

또 어머님은 제사를 모시지 않겠다는 큰집을 이해하셨으며, 아버님에게 그까짓 거 우리가 하면 된다고 아무렇지 않으니 미안해하지 마시라며 아버님을 다독이셨고 만남을 주선하기 위해 우리 가족 모두를 이끌고 부산으로 피서 가자는 제안 하셨다.

그해 여름 우리 가족은 처음으로 피서를 가게 되었다.

처음으로 부산에 도착한 우리 가족은 7시간이 넘는 길었던 여정에 모두 지쳐있었지만 나와 여동생은 마냥 신이 나 있었다.

처음으로 큰집을 방문한 우리는 우리의 삶과 너무나 많이 달라 신기하기도 했고 당황스럽기도 했는데 그중에서도 공중화장실이 가장 기억에 남았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당시 화장실을 가려면 ‘똥 표’라는 것을 구입해야 이용할 수 있었는데 대략 50원쯤 했던 것 같다.

앞면은 백색이고 뒷면은 어두운 회색인 조금 두꺼운 마분지에 사각형의 빨간색 도장날인이 찍혀있던 ‘똥 표’는 조잡하기까지 했었다.

월곡동의 공중화장실도 그리 좋은 환경은 아니었지만 돈을 받지는 않았는데 이곳은 달랐다.

화장실을 이용할 때면 입구에 매표를 하시는 할머님이 계셨는데 [작은 거야 큰 거야?] 하며 물어보셨다.

그런 질문이 싫어 왜 그런 걸 묻냐고 큰 아버님에게 물었더니 이용료가 다르다고 하셨다.

큰집의 형제는 모두 5명인데 위로누나가 2명 아래로 여동생과 남동생 2명이 있었다.

층고가 높은 구조라 목수일을 하셨던 큰 아버님께서 집을 개조하셨는데 다락이라 하기엔 넓은 침실이 2칸 더 있었고 여자형제가 많았기에 큰방은 누나와 여동생이 작은방은 남동생들이 사용하였으며 방 중간에는 항상 요강이 자리하고 있었다.

아마 화장실 사용료를 아끼기 위해 요강을 사용하신 듯 보였다.

할머님, 할아버님 방에도 요강이 있었지만 요강을 사용해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큰집에서의 첫날밤은 나에게 잊지 못할 트라우마를 남겼는데 훌쩍 커버린 지금도 당시의 기억이 잊히지 않는 걸 보면 충격이 대단했던 것 같다.

첫날밤 낯선 환경 탓에 쉽게 잠을 청하지 못하고 뒤척이다 소변이 급해 자리에서 일어나 요강을 열었는데 나름 포함한 7명의 아이가 밤새 모아둔 소변이 찰랑이며 금방이라도 흘러 넘 칠 듯 보였다.

하지만 당장 해결하지 못하면 나 역시 곤란하였기에 물러설 수 없었다.

그렇다고 새벽녘에 그것도 남의 집에서 ‘똥 표’를 찾기 위해 잠들어있는 어른을 깨울 수 없는 노릇이라 과감한 도전을 시도해 보았고 결과는 참사였다.

물론 흘러넘치지는 않았지만 문제는 다음날이었다.

요강을 비우기 위해 누군가는 이 녀석을 들고 1층으로 옮겨야 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100% 흘러 넘 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누군가가 될지 확인하고 싶었지만 확인하지 못했다, 다만 그간의 행동으로 보아 큰어머님이 가장 유력해 보였다.

왜냐면 매일 저녁 빈 요강을 2층으로 올려주셨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태종대도 가보았고 해운대도 가보았다 마냥 신이 나 있던 우리와는 달리 어머님은 큰 아버님과 큰어머님 그리고 아버님을 대화의 장으로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하셨고 당신의 그런 노력으로 아버님은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오셨다.

여행의 목적을 달성하신 어머님은 당신의 노력으로 변화된 아버님을 보시며 만족해하셨고 그렇게 우리 가족의 첫 여행이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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