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코스母스 4화
# 연이은 화재사고
이듬해 여름 몸도 마음도 모두 녹아내릴듯한 더위에 엄마 아빠는 물론이고 나와 함께 형들도 지쳐있던 8월 초순이었다.
[아들~ 얼음집 가서 얼음 100원 치만 사가지고 와라] 더위에 지친 아버지가 얼음 신부름을 시키셨다.
지금이야 100원으로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지만, 당시 종이딱지 1판에 20원이었으니 딱지 5판을 구입할 수 있는 돈이었다.
요즘 종이딱지 1판에 1,000원 정도이니 대략 5,000원 정도로 이해하면 좋을듯하다.
아무튼 그렇게 100원짜리 얼음을 바가지로 공수하면 아버지는 바늘을 이용해 조각조각 자르신 후 한입크기가 되면 형들은 하나 둘 얼음을 입에 물어가며 더위를 이겨내고 있었고 이미 녹아버린 얼음물은 나와 어머님의 몫이었다.
그렇게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날 일과를 마친 아버지와 형들이 근처 술집에서 간단한 회식을 하였는데 회식 당일은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다음날이 문제였다.
간밤의 회식에 더위까지 기승이니 다들 숙면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평소모습과는 다르게 꾸벅꾸벅 졸고 있는 용식이 형과 잠을 깨기 위해 열심히 줄담배를 피고 있는 노인네형의 모습은 안쓰럽기까지 했다.
힘들어하는 건 아버지도 마찬가였다. 연신 하품을 하고 계셨으며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Dschinghis khan - Dschinghis khan이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아무도 따라 부르지 않았다.
평소 같았으면 첫 소절은 몰라도 후렴 부분이 나오면 너나 할 것 없이 징징 칭기즈칸 ~ 하며 따라 불렀던 노래였지만 그날만은 칭기즈칸도 이겨내지 못했었다.
[얘들아! 다들 힘들어 보이는데 오늘은 그만하고 들어갈까? 피곤하면 오늘은 좀 쉬고 내일 다시 하자] 아버님이 먼저 제안하셨고 형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예 감사합니다.]하며 제안을 받아들였다.
당연히 각자 자신의 집으로 갈거라 생각했던 아버지의 생각과는 다르게 제단을 위해 준비해 둔 가죽을 대충 깔고 그 자리에 누워 잠을 청하고 있었다.
형들이 근무하던 곳은 2층이었다.
2층에는 본드냄새를 제거하기 위해 커다란 창문이 사방에 뚫려있었고 모든 창문을 개방하면 제법 바람이 잘 통해서 여름철엔 그래도 제법 시원하게 보낼 수 있었다.
평소보다 일찍 마친 형들이 작업장에서 잠을 자는 동안 어머님이 지쳐있던 나에게 등목을 제안하셨다.
그 시각 조금 일찍 일어난 용식이 형이 담배를 한 대 피워 물고는 한참을 멍하니 앉아있다가 잠이 덜 깼는지 머리를 이리저리 흔들어 댔지만 쏟아지는 잠을 막을 수 없었는지 다시 자리에 누워버렸다.
용식이 형은 잠을 깨기 위해 입에 물고 있던 담배가 귀찮아졌다.
순간 용식이 형의 눈이 작은 깡통에 꽂혔고 깡통 안에는 맑은 물이 반쯤 고여있었다.
잠이 덜 깬 용식이 형은 마치 술에 취한 듯 판단력이 흐려졌으며 아무런 의심 없이 깡통 안으로 담뱃불을 집어던졌는데 순간 펑하며 불길이 치솟았다.
펑하는 소리에 주위에 함께 있던 형들이 놀라 빠른 속도로 현장을 벋어났고 아래층에 있던 우리 식구들이 오히려 대피가 늦었다.
용식이 형은 물이 아닌 신나에 담뱃불을 집어던졌던 것이었다.
이미 신나에 불이 붙이면 물로는 끌 수가 없다. 더욱이 신발공장에는 본드나 가죽이 많기에 막상 불이 붙으면 진압이 힘들다.
우리는 그렇게 하루아침에 거리로 내몰렸고 여름방학이 2 주남짓 남아있던 방학중의 일이었다.
그날 이후 외갓집으로 보내졌지만 생각보다 수습이 빨랐고 개학 전에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어른들의 대화를 통해 알게 되었던 사실인데 아주 큰 손실이 있었지만, 그간 받지 못했던 미수금을 통해 제건 할 수 있었다고 하였다.
천만다행인 것은 용식이 형의 머리카락이 그을린 것 말고는 인명피해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다시 일상을 회복하고 있을 무렵 순옥이 고모가 찾아왔다.
고모라고 부르고 있었지만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어찌나 서럽게 울던지 함께 있던 어머님은 덩달아 함께 눈물을 보이며 이야기를 들어주고 계셨으며 무엇 때문에 화가 난 건지 알 수 없지만 아버님은 몹시 화가 나 있었다.
문을 닫고 있었지만 문 틈 사이로 어머님의 목소리와 아버님의 행동을 볼 수 있었다.
[그래도 참고 살아야지 어떻게 해. 고모 아이도 가졌다며]
그렇게 순옥이 고모가 우리와 함께 하룻밤을 보낸 뒤 어머님의 권유로 돌아가셨다.
어머님은 돌아가는 순옥이 고모에게 차비 하라며 얼마의 돈을 쥐어 주셨는데 덕분에 내가 학교에 납부해야 할 육성회비가 하루 미루어졌다.
순옥이고모가 돌아가고 난 며칠 후 훤칠한 키에 짙은 눈썹 그리고 피부색이 가무잡잡한 사내가 찾아왔다.
아버지보다 큰 키에 바짝 마르고 다부져 보였지만 아버지를 상대할 만큼 강단이 있어 보이진 않았다.
두 분의 대화를 통해 순옥이고모의 신랑 고모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형님! 순옥이 빼돌렸지요! 빨리 보내세요] [야! 이 사람아. 집에 보냈다고 말했잖아 왜 사람말을 못 믿어 그만 돌아가게] [다 알고 왔어요 여기 왔다면서요 통화도 했는데 왜 이러세요]
[어허 집에 보낸 지 며칠 됐다니까] [어제 통화했는데 왜 자꾸 이러세요] [누가 그래 순옥이가 그러던가?] [예 여기 있으니 찾지 말라고 하던데요] [이것들이 쌍으로 미쳤나 왜 남의 집에 와서 지랄들이야 안 그래도 속 시끄러운 사람한테 어서가]
사내가 아버지를 향해 거세게 항의하였지만 아버지의 힘에 밀려 밖으로 밀려 나갔다.
그리고 잠시 뒤 어떻게 알았는지 경찰관들이 찾아와서 고모부를 데리고 가벼렸지만 분이 풀리지 않았던 아버지는 여전히 씩씩거리고 있었다.
동네사람들이 구경할 정도록 요란하게 언성을 높였기에 경찰이 돌아가고 난 후 건너편 뻥튀기집 아저씨하고 석유집 아저씨가 다녀갔었다.
석유집 아저씨는 수다스럽기로 유명한 분이었는데 그분이 다녀간 후 동네사람들은 면식도 없는 순옥이고모를 안주거리로 삼았는고 대부분 석유집 아저씨의 입으로 전달되었다.
저녁에 석유신부름을 위해 석유집을 찾았을 때 이미 와계신 곤계란집 아저씨에게 순옥고모 이야기를 하고 계셨다.
석유집 아저씨는 커다란 통에 석유를 담아두고 판매하셨는데 사각형 쌀되를 기다란 작대기에 매달아 한 돼 두되 단위로 판매하셨고 우리 집은 주로 한 되만 구매하였으며, 그때마다 커다란 소주병에 양철 깔때기를 꽂은 뒤 석유 한 되를 넣어주셨다.
석 유한병을 들고 집으로 돌아온 내가 석유집 아저씨와 곤계란집 아저씨의 이야기를 들려드리자 아버지는 다시 한번 화를 내셨다.
한바탕 소동이 있던 다음날 고모부가 다시 한번 양화점으로 들리셨는데 아버지의 호통에 쫓겨난 고모부가 홧김에 양화점에 불을 지르셨다.
불길은 삽시간에 건물을 뒤덮었고 밖으로 나가기 위해 쇼윈도를 부신 후에야 모두 밖으로 대피할 수 있었다.
가장 먼저 대피하신 아버지가 방화 후 도망가던 고모부를 쫓아가 잡았지만 피해보상을 받을 수 없었고 2번의 화재로 재기하기 힘드셨던 아버지의 선택은 고모님이 살고 계시던 강원도로 이사 가는 것이었고 그곳에서 아버지는 쿵후 체육관을 운영하셨다.
나중에 아버지와 지인분들의 이야기를 통해 순옥이 고모가 어머님의 조언에도 귀가하지 않으셨으며 우리 집에 있다고 거짓말을 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불량배였던 고모부는 아버지를 상대로 이길 수 없었기에 홧김에 불을 질렀다고 증언하셨고 실형을 살았다.
이후 두 분의 근황에 관한 어떠한 이야기도 어른들은 하지 않으셨으며 모두가 원치 않았지만 우리는 강원도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야 했다.
아마도 강원도가 고향인 아버님이나 어머님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의미에서 고향으로 오지 않으셨을까? 아니면 심리적 안정을 위해 그리로 가셨을지도 모르겠다.
강원도 영월이 고향인 아버지는 영월에서 태어나 유년시절 그곳에서 자랐다고 말씀하셨으며 강원도 원주가 고향인 어머님 역시 그곳 원주에서 자랐다고 말씀하셨다.
원주야 첫 번째 불이 났을 때 외갓집에서 보내었기에 잘 알고 있었지만 영월은 한 번도 가본 적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영월도 원주도 아닌 태백에서 도약을 준비하였고 그렇게 나의 일상에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