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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기선 Apr 03. 2024

시간을 파는 편의점(2화)

시간을 배달해 드립니다.

한 통의 전화를 받고 나가려는 석구를 종서가 잡아 세우며 말했다. 

"오늘은 우리랑 함께 있으면 안 돼? 이석이 생일이잖아!" 새삼스러운 행동을 하는 종서를 무심하게 바라보던 석구가 그녀가 잡고 있던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 

"왜! 이래 새삼스럽게 하루 이틀 있는 일도 아닌데." 

그러다 돌연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아들 이석을 안아 올리던 석구가 "이석아 생일 축하해! 그런데 어쩌지 아빠가 급한 일이 생겨서 미안해! 아빠 다녀올게~" 하며 양쪽 볼에 입맞춤한 후 내려놓는다. 

이석은 자주 있는 일인 양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그런 이석을 바라보던 종서가 "저 봐 이석이 토라졌잖아!" 하며 석구를 원망해 보지만 석구는 웃어 보이며, 장난스러운 미소를 남겨두고 가족을 뒤로한 채 서둘러 집을 빠져나왔다.




붉은 조명의 복도에 유리 파편이 요란하게 깔려있고 벽에 걸려 있어야 할 액자가 땅에 부서진 체 아무렇게 나뒹굴고 있으며, 간혹 상처 입고 쓰러진 사내들과 흐느끼는 여인이 휘청거리며 일어나는 지하 룸살롱에 석구가 달려 들어오며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형님은?" 

"다행히 현장을 빠져나가셨습니다. 하지만 이번엔 피해가 너무 끕니다. 형님! 언제까지 참고만 있어야 합니까? 그러지 말고 우리도 그놈들 칩시다. 예?" 

벽에 반쯤 기대 있던 남성이 몸을 추스르며 말했다. 

"많이 다쳤냐?" 석구가 남성에게 안타까운 표정으로 물었지만, 남성은 잔뜩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답했다. "지금 제가 다친 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큰 형님도 당할 뻔했다고요" 

"알았다. 하지만 이건 내 뜻이 아니라 큰 형님 뜻이다. 나도 누구보다 되갚아주고 싶다. 하지만 큰 형님이 뜻을 굽히지 않으시니…. 나도 어쩔 수 없지 않냐!" 

"이러다 우리 애들 다 죽습니다. 형님이 다시 한번 잘 말씀 좀 해 주세요." 

간신히 일어선 남성이 무릎을 꿇어가며 애원하자 석구가 남성을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알았다고 알았으니 너는 우선 몸부터 추슬러라" 화가 난 석구의 아랫입술이 바르르 떨고 있었다.




석구가 펠리스 호텔 1012호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를 기다리고 있던 조직원들이 각목과 야구방망이 그리고 시퍼런 칼을 들고 석구를 일방적으로 때려눕혔다. 

만신창이가 된 석구가 고개를 들자, 자신이 모시던 큰 형님과 상대 조직의 보스가 석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형님! 어떻게 된 겁니까?" 석구가 힘겹게 물었다. 

"석구야! 이제 그만하자 나도 더는 지겨워서 못 하겠다. 너도 이제 그만하고 좀 쉬어라!" 

"형님! 형님이 어떻게…." 석구가 말을 이어가자, 뒤쪽에 서있던 사내가 석구의 등에 칼을 꽂았다. 

그러나 석구가 저항하며 칼을 꽂은 사내를 오른쪽 주먹으로 내질러 쓰러뜨리자, 이번엔 그가 모셨던 큰 형님이 다른 조직원의 방망이를 빼앗아 석구의 목덜미를 가격하였다

그날 이후 석구는 살인미수 혐의로 7년 형을 선고받았고 23년 여름 출소하였다. 

석구가 출소하던 날 그를 맞이한 건 조직원도 그의 아내도 아닌 도연이었다

그녀는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있던 석구를 병원으로 옮겨 치료해 준 근처 병원의 간호사였다. 

일면식도 없는 석구를 그것도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있는 사내를 보면서도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일을 처리할 정도로 강단이 있는 여성이었다. 

치료 후 석구가 연행되면서 그들의 인연은 끊어졌지만, 석구가 복역 중에 자신을 돌봐주었던 도연에게 감사 편지를 보내면서 끊어졌던 인연이 이어졌고 마침내 연인으로 발전하였다.




"어디로 갈 거야?" 교도소를 나온 석구에게 던진 도연의 첫마디였다. 

"이제 막 출소한 사람에게…." 눈을 부라리며 쳐다봤지만 더는 말 하지 않았다. 

"알잖아 나 현실적인 사람인 거 사실 당신이 출소하면 제일 먼저 어디로 가려할지 늘~ 궁금했거든 하하하!" "왜? 그게 왜? 궁금한데? 설마 도망간 여편네라도 찾아갈까 봐?" 석구의 말에 도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도 그럴 것이 사고 직후 석구의 처가 아들을 데리고 석구를 떠났지만, 외국으로 간다고만 했지 정말 이민을 간 건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더욱이 서류상으론 여전히 부부관계를 이어오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늘 불만이기도 했고 불안하기도 했던 터였다. 

"아니 뭐! 그냥…." 자신의 불안한 마음이 들키자도연은 말을 잊지 못했다. 

"걱정하지 마! 나 싫다고 버리고 떠난 사람에게 매달릴 만큼 너그럽지 않아!" 석구의 단호한 말에 안도한 도연이 비로소 밝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자기 나오면 삼겹살에 소주 먹고 싶다고 했잖아! 그거 먹으러 가자" 장난스럽게 웃고 있는 도연을 바라보던 석구가 

"아니야 먼저 갈 때가 있어" 하며 그녀의 말을 물렸다. 

그 길로 석구가 제일 먼저 찾은 곳은 변호사 사무실이었다. 

그곳에서 자신을 버린 전처와의 이혼소송을 하였고 큰 무리 없이 이듬해 봄에 비로소 마무리되었다. 

이혼이 확정되던 그날, 석구는 도연과 함께 혼인신고도 했다. 

그것이 자신을 지키고 지지해 준 도연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그에게 4월 19일은 결혼기념일이자 전처와의 이혼 일이기도 했다. 

그녀와의 새로운 시작은 석구에게 또 다른 기회이자, 삶에 대한 희망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석구의 마음 한편에는 여전히 지우지 못한 과거의 추억이 남아있었다. 

도연과 함께 걸을 때 주변의 아이들을 보는 석구의 눈에서 아들 이석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읽혔기 때문이었다. 

"왜! 아들 보고 싶어?" 도연이 물었다. 

"아니야! 그냥 본 거야!" 황급히 시선을 돌리며 석구가 말했지만 이미 마음이 읽힌 뒤였다.

"보고 싶으면 보고와! 참지 말고 아비가 자식 그리워하는 건 당연한 거야! 숨기려 하지 마! 난 상관없어! 그러니 보고 싶으면 언제라도 보고와!" 

도연의 말에 오히려 미안함을 느낀 석구가 도연의 어깨에 팔을 올리며 그녀를 끌고 황급히 자리를 벗어났다.

그날 저녁 침대에 기대어 TV를 시청하던 도연과는 다르게 석구는 핸드폰을 만지고 있었다. 

"어! 시간을 판다고? 이게 뭐지?" 석구가 누구를 지칭하지 않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왜! 누가 시간을 판대? 얼마래? 자기는 시간이 생기면 어디로 가고 싶어? 아니 어떻게 쓰고 싶어?" 

도연이 장난스럽게 물었지만 석구는 '글쎄 생각해 본 적 없는데….'라는 퉁명스러운 말만 남겼다. 

"자기야! 실업은 소리 하지 말고 우리 술이나 한잔할까? 오래간만에!" 도연이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술? 술은 갑자기 왜? 너 술 못 먹잖아!" 자신을 빤히 쳐다보던 도연을 향해 반문했다. 

"헤헤 설마 내가 술을 먹겠어! 자기는 술 마시고 나는 다른 걸 먹겠지! 그것보다 사실 내가 할 말이 있거든." "무슨 말? 해 그냥 꼭 술을 마셔야 하는 거야?" 석구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니…. 뭐 꼭 은 아니지만…. 아무튼 그러자! 응!" 도연의 알 수 없는 태도에 마지못해 일어선 석구의 팔에 자기 팔을 끼워 넣으며 도연이 따라나섰다. 

아파트를 나와 편의점으로 향할 때 도연이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보여줄 게 있는데…. 아니다!! 나중에 보여줄게" 하며 말을 멈췄다. 

"뭔데? 오늘 좀 이상하다. 뭔데? 사람 불안하게 하지 말고 그냥 말해!" 석구가 다구 쳤지만, 도연은 여전히 웃고만 있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편의점은 큰 사거리 모퉁이에 있었고 늦은 저녁이라 사람도 지나가는 차도 그리 많지 않았다.

"내가 들어가서 얼른 사 가지고 올 테니 넌 밖에서 기다려" 석구가 도연을 향해 말했지만 도연은 "싫어!" 하며 맞섰다. 

"너! 또 들어가서 이것저것 마구 골라 담을 거잖아! 그러니 밖에서 기다려 얼른 필요한 것만 사 가지고 올 테니" 평소 군것질을 좋아해 편의점에 들어가면 군것질거리를 사 들고 오는 도연의 모습이 싫었던 석구가 말했다. 

"치! 알았어!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 참는다." 도연이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가 들어가자도연은 주머니 속에서 작은 수첩을 꺼내 들어 펼쳐 보았다. 

수첩 안에는 형태를 알 수 없는 흑백 사진이 있었고 수첩의 곁 표면에는 산모 수첩이라고 쓰여 있었다. 

흐뭇한 표정으로 수첩을 바라보던 그때 커다란 굉음과 함께 위쪽 차선에서 검은색 승용차가 신호도 무시한 채 비틀 거리며 도연 쪽으로 달려들었다. 

사거리 건널목에 있던 신호등을 먼저 들이박은 승용차가 그대로 밀고 들어와도연까지 들이받은 후에야 멈춰 섰다.

한순간이었다.

소리에 놀라 황급히 밖으로 나온 그는 처참한 광경에 말문이 막혔다.

"119 누가 신고 좀 해 주세요~"

사고지점에서 10m가 떨어진 지점에 도연이 있었지만, 너무나도 처참한 모습에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병원 이송을 위해 구급차에 함께 오른 석구의 눈에 분주하게 움직이는 119 대원들 사이로 드러난 도연의 손 그리고 그녀가 잡고 있던 수첩에 시선이 멈췄지만, 그뿐이었다.

그녀의 안위 말고는 어느 것도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수술실 앞에 초조한 모습으로 앉아있을 때 어려 보이는 간호조무사가 도연이 들고 있던 수첩을 건네주었고 그것을 건네받은 석구는 또 한 번 오열했다.

그리고 1년 후 

"밥은 먹었어? 기분은 어때?" 퇴근길에, 평원에 들린 석구가 도연에게 물었다. 

그러나 그녀는 석구의 말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돌아누웠다. 

그런 모습이 익숙한 듯 이불속 그녀의 다리를 찾아내 주무르기 시작했다. 

잠시 조용한 침묵이 흐를 때 병실 문이 열리며 간호사가 들어와 말했다. 

"보호자분 오셨네요! 장도연 님~ 좋으시겠어요. 하하하" 

"예! 이 사람 오늘은 어땠나요?" 

"걱정하지 마세요. 식사 잘하셨어요." 간호사가 눈을 깜박이며, 속삭이듯 말하고 병실을 빠져나갔다. 

간호사의 말에 미소로 보이던 석구가 또다시 도연의 다리를 주무르려 이불을 열 때 그녀가 말했다. 

"당신이 아무리 다리를 주물러도 난 몰라! 그리고 이미 죽었어! 되살아나지 않아! 그만해! 그리고 더는 찾아오지 마!" 여전히 등을 돌린 채 도연이 말했다. 

"또 그 소리다. 네가 말했잖아 포기하는 건 희망도 사라지는 것이라고 그리고 두드리면 열린다며! 교도소에 있을 때 면회 오면 네가 늘 하던 말 아니야! 난 절대 포기 못 해 네가 나에게 어떻게 했는데…. 못해 안 해!" 

석구의 말에 도연은 조용히 눈물을 흘렸지만, 그는 보지 못했다. 

한바탕 소리를 지르고 밖으로 나온 석구가 벽에 잠시 기대어 '후~'하고 깊게 한숨을 몰아쉬었다. 

예전 같지 않은 도연의 모습을 볼 때면 복잡한 생각이 머릿속을 떠다녔고 그럴 때마다 그는 병원 내 유일한 흡연 장소인 중정을 찾았다. 

바지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찾아들고 안쪽 주머니에 있던 담배를 꺼내 문 그가 벤치에 앉아 하늘을 향해 담배 연기를 뿜었다. 

그러다 문득 오전에 도착한 카톡이 생각나 휴대전화를 꺼내 들고 그것을 읽었지만 대부분 광고성 소식일 뿐 다른 것은 없었다.

그런 광고성 메일이 짜증스러워 전원을 끄려는 순간 '시간을 팝니다'라는 짧은 메시지 보았다. 

사고 전 잠시 보았던 기억이 있어 그것의 팝업창을 열어 접속을 시도해 보았다. 특별한 기대도 하지 않았다. 어쩌면 한 번쯤 보았던 강렬한 카피에 끌려 생각 없이 누른 것일 것이다

그러나 몇 시간을 선택할지 또 과거인지 미래인지, 사연에 따라 금액이 달라진다는 것과 같은 구체적인 요구가 석구의 시선을 끌어당겼다. 

물론 구매 전 후기도 꼼꼼히 읽었다. 

가상의 시간이 아닌 현실의 시간을 살 수 있다는 후기를 읽을 땐 자신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뭐!!! 시간을 살 수 있다고? 허!~" 그는 짧은 탄식을 내뱉은 후 주의 사항까지 빠지지 않고 모조리 읽었다. 

도연을 사고 이전으로 되돌릴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겨서일까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앞뒤 잴 것 없이 구매 버튼을 누른 순간 또 다른 생각이 머릿속을 흔들었다. 

자신의 선택에 따라 전처와 아들까지 본래 자신의 가정으로 되돌아갈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힘들 때 자신을 버리고 이민을 선택한 그녀보다 내내 곁을 내어준 도연이 더욱 고마웠다. 

하지만 아들 이석이 마음에 걸렸다. 도연과 있으면서도 한 번도 잊은 적 없었기 때문이었다. 

선택을 서둘러야 했다. 구매 버튼을 누른 순간 7분의 카운트가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7분이 지나면 팝업이 자동으로 사라진다는 짧은 경고를 읽은 후라 초조함은 극에 달했지만 서두르지 않았다.




강남역 사거리 커피숍에 초조하게 앉아있던 석구가 도로 쪽으로 나 있는 커다란 통창으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위아래 검은색 옷을 입은 제훈이 검은색 바이크를 타고 커피숍 앞에 멈춰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석구가 빠른 걸음으로 사내에게 달려가 물었다. 

"진짜 오셨네요. 감사합니다. 이건가요?" 목소리가 불규칙적이고 떨렸기 때문에 그가 흥분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석구 씨! 맞나요?" 라이더가 확인차 묻자 허둥지둥 바지 주머니에서 신분증을 꺼내 보이며, "예 ~ 이거 확인해 보세요" 하며 석구가 말했다.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사연이…." 석구의 사연을 읽던 라이더가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말을 흐렸다. "왜! 안 되나요?" 

"아니요! 됩니다. 다만 이런 사연은 처음이라…. 사용설명 잘 보시고 행복하세요!" 

라이더가 행복하게 지내라고 말했지만, 석구는 그래 보이지 않았다. 

그와 헤어져 오던 길에 잠시 멈춰 선 라이더가 편의점에서 받은 A4 용지 속 사연을 내려다보았다. 


나에겐 전처와 현 처가 있습니다.
전처는 내가 수감 중일 때 날 버리고 도망을 갔어요. 
그리고 내가 힘들 때 나를 지켜준 지금의 아내는 급발진 차량에 의해 하반신 마비가 되어 인생을 포기하며 살아가고 있고요.
정말로 시간 구입이 가능하다면....
날 만나지 않았다면 충분히 사랑받고 살았을 두 여인을 위해 전처를 만나기 2시간 전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이전 01화 시간을 파는 편의점(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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