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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기선 Apr 15. 2024

시간을 파는 편의점 (5화)

가난한 부자

"아빠! 급히 사랑합니다." 딸 시은이가 아빠 동일을 뒤에서 안으며 말했다.

"왜! 또 급히 사랑을 하실까…. 아빠를 사랑하는 거냐, 지갑 속의 돈을 사랑하는 거냐?" 성일 이 눈을 흘기며 물었다.

"당연히 아빠지, 다만 곳간이 빈곤한 탓에 보다 적극적인 사랑을 표하는데 제약이 따를 뿐입니다." 시은이 웃으며 말했다.

"계집애 그러면 그렇지…. 이 정도면 곳간이 조금은 차겠냐?" 성일 이 자신이 신고 있던 양말의 목 부분에서 5만 원짜리 4장을 건네며 물었다.

"뭐…. 냄새가 조금 나기는 하지만 이 정도면…. 감사합니다." 시은이 밝게 웃으며 말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일화가 동일의 등을 후려갈기며 소리쳤다.

"내가 달라고 할 때는 없다고 하더니 시은이가 달라니까 없던 돈이 생기고 그러네…." 웃음 섞인 목소리였지만 씁쓸함도 묻어 있었다….

"휴~ 시은 아빠 애가 달라는 대로 다 주면 어떻게 해요. 이제 곧 학자금도 내야 하는데…." 길게 한숨을 내쉬던 일화가 푸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말에 고개를 숙인 성일 이 힘없이 속삭이듯 "알았어!" 하고 짧게 말하곤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시은아! 아빠 출근하신다.!" 일화가 안방을 향해 소리치자, 시은이 달려 나와 인사를 했다.

"다녀오세요~" 여전히 장난스러운 시은의 모습에 조금 전 어둑했던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지며 성일 이 말했다.

"딸~ 알러뷰~~~" 밝게 웃어 보였지만 집 밖을 나오기 전까지만 유지된 미소였다.

부유하진 않았지만, 성인은 행복했다.

그는 가족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안위(安慰)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그저 평범한 가장이었으며, 가족의 행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다만 그의 노력이 온전히 전해 지는 건 그의 마음일 뿐 금전적인 보상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두 번의 사업 실패 때문에 자존감이 떨어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아파하고 있을 만큼 여유롭지 못했기에 뭐든 해야 했고 결국 지인의 소개로 물류센터에서 현장 관리직을 제안받아 근무하기 시작한 게 벌써 5년이 지나가고 있었다.

관리직이지만 근로자가 없으면 자신이 직접 상하차 작업을 해야 할 정도로 열악한 환경이었다.

그럼에도 자신을 받아줬다는 감사함과 소개해 준 지인의 면을 봐서라도 소홀할 수 없었다.

가정을 꾸리고 산다는 것이 마음만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을 결혼 전에는 그도 그의 아내도 알지 못했다.

처음 몇 년은 사랑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지만, 시은이가 태어나면서 현실적인 어려움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시은이가 자란 만큼 경제적 부담도 함께 자랐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모든 생활이 힘들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시은이가 있어 지금의 자신이 버티고 서있는지 모른다고 생각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물론 그의 아내도 충분히 힘이 되었지만, 그녀에게 받는 사랑과 딸 시은이 에게 받는 행복감을 따로 분리하여 저울질하기엔 애초부터 무리였을 것이다.

성일의 삶은 온통 가족에게 맞춰진 다람쥐 쳇바퀴에 불과했지만, 그는 그런 삶을 부정하거나 원망하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가족은 유일한 위안이자, 삶의 이유였다.

그러나 가족들에게 큰 경제적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생각은 그의 마음을 늘 무겁게 했다.

출근길에 힘없이 던졌던 아내의 학자금 이야기를 들었을 땐 심장이 아렸다.

언제나 웃는 얼굴의 아내였지만 이날 아내의 얼굴은 낙담해 있었고 그것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동일은 충분히 고통스러웠다.

'돈만 있다면, 저들이 조금은 더 행복해질 텐데...' 동일은 마음속으로 수없이 되뇌었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그날 저녁 퇴근 무렵 축 처진 몸으로, 신호등 앞에서 멈춰 서 있던 동일은 우연히 핸드폰 화면에 뜬 팝업창을 보게 되었다.

"시간을 판매합니다.? 훗 재미있는 카피네" 동일이 '훗'하고 코웃음 쳤지만, 이목을 끌만큼 강렬한 카피에 자신도 모르게 팝업창을 클릭했다.

뒤이어 MAX 2시간 이내 원하는 시간으로 데려다준다는 말과 사연에 따라 가격이 차등적용 된다는 말 그것 말고도 동일을 충분히 자극할 만한 내용이 많았다.

"뭐야! 설마 진짜야? 에이~ 아니겠지!" 반신반의 심정으로 신청 절차를 따라가던 성일은 점점 그것이 현실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이게 정말 가능한 일인가?" 자신도 모르게 희망의 끈을 잡고 있었다.

결국, 동일은 시간을 구입하기로 했고 잠시 후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자신의 처지와 함께 과거로 돌아가 로또를 구입하고 싶다는 말도 남겼다.

결혼 전 6주 동안 당첨자가 나오지 않아 상금액이 최대치에 이르렀던 것을 생각해 낸 동일은 발표 2시간 전으로 돌아가길 희망했다.

편의점 측에서 요구했던 금액도 만만치 않았지만, 현실로 이루어진다면 그것을 지불하고도 충분히 남을 만큼의 금액이었기 때문에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더욱이 믿지 못하겠다는 동일을 향해 후불제 제안까지 했던 터라 더욱 그랬다.




"이렇게 배달까지 해 주시고 감사합니다." 동일이 라이더에게 짧게 인사하고 받아 든 시간 상자를 그 자리에서 열었다.

궁금증과 조바심이 생겨 자리를 이동한다거나 하는 행동은 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바로 열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잠시 후 동일의 몸에서 밝은 빛이 생기더니 그가 사라졌지만, 라이더는 당황하지 않고 그 자리를 지켰다.

그가 사라지고 2시간이 흐른 뒤 그가 사라졌던 자리에 작은 바람이 일렁이다 땅에서 강한 빛이 하늘로 솟아오르더니 그 빛 속에서 동일의 모습이 다시 보였다.

처음 그가 사라지기 전의 복장과 다른 복장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변화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저에게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여기 있습니다." 동일이 작은 가방과 함께 꾸벅 인사를 하며 말했다.

가방을 받아 든 라이더가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그것을 받아 들고 자리를 떠났다.




편의점으로 복귀한 라이더가 점장에게 가방을 전하며 물었다.

"왜? 그 사람에게 시간을 판 거예요?" , "왜라니? 장사꾼이 물건을 팔았는데 그런 질문이 어디 있어?"

"아니요! 지금까지는 그러지 않으셨잖아요. 분명 그자가 후회할 걸 알면서 판매하신 거잖아요."

"물론 나도 처음엔 말렸지! 하지만 그자가 믿지 않았어! 돈이면 다 해결될 것처럼 아니 그럴 거라고 절대적으로 믿고 있었거든 이미 그렇게 마음먹은 사람에게 설득은 의미 없잖아!" 점장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도 막으셨어야지요! 열심히 살아왔던 사람인데…." 라이더가 목소리를 높였다.

"자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일 거로 생각하나? 정말 슬퍼할까? 그조차도 확실치 않잖아? 후회? 글쎄…. 그럴까? 난 모르겠는데…. 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제훈 씨 말대로 열심히 살았지, 가족을 위해서…. 하지만 목적을 잊고 열심히만 살지는 않았을까?" 목적을 잊은 채 열심히만 살지 않았겠느냐는 점장의 말에 라이더가 더는 반론하지 않았다.




로또 발표 2시간 전이었기 때문에 당일 발표될 최고 금액 당첨금 말고도 다음 회차까지 모두 2회에 걸쳐 당첨금을 받게 된 동일은 그야말로 인생 역전의 주인공이었다.

일을 마친 그가 처음의 세상으로 돌아왔을 때 입고 있던 옷에서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성일은 바뀌어있을 본인의 삶이 궁금했지만, 그보다 마음을 가다듬을 시간과 허기를 달래줄 밥 한 끼가 간절했다.

근처 국밥집을 찾은 그가 국밥과 함께 소주도 한 병 시켰다.

동일은 실없이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히죽거렸다.

그의 히죽거림 때문이지 국밥집 여사장도 덩달아 밝게 웃으며 그를 맞이했다.

"미친년 속옷이라도 보셨나~ 뭐가 그리 좋아요?" , "봤지요! 더 좋은 걸 봤지요 하하하!" 여사장을 향해 농익은 농담을 건넬 만큼 마음의 여유가 생겼으며, 연신 히죽거렸다.

평소 무채색의 그를 생각해 보면 지금의 밝은 모습은 마치 초봄의 벚꽃처럼 아름다웠고 그것을 알아차린 여사장의 농담을 여유롭게 받아칠 만큼 여유로운 모습은 고무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기분 좋게 술 한잔을 마시고 집으로 돌아갈 때 거리의 가로등이 마치 새로운 시작과 그가 걸어갈 새로운 길을 안내하는 것처럼 밝고 곧게 빛나고 있었다.

고개 숙인 가로등 사이를 걸으며 행복한 미소로 자신을 맞이할 식구들을 생각하니 더없이 행복했다. 하지만 그런 행복도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온 동일이 반쯤 열린 대문을 박차고 들어가 현관문의 손잡이를 잡아당기는 순간 안쪽에서 낯선 사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요?" 감히 내 집에서 나에게 누구냐는 질문을 할 남자는 고향에 계시는 아버님과 장인어른을 제외하곤 아무도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순간 당황한 동일이 잠시 머뭇거리다 한걸음 뒤로 물러서 자신이 걸어 들어온 대문을 바라보다 확신에 찬 얼굴로 이번엔 주먹으로 '쾅' 하며 문을 내리쳤다.

"누구세요?" 동일의 행동에 조금 전 그 목소리의 사내가 문을 열며 물었다.

"누구예요?" 동일과 눈이 마주친 사내가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는 당신은 누군데 남의 집에 있는 겁니까?" 동일이 잔뜩 미간을 찌푸리며 답했다.

"남의 집? 이게 무슨 소리야? 이 양반이 술을 자셨나…!" 사내가 험상궂은 얼굴로 동일의 어깨를 밀치며 말했다. 

순간 동일이 사방을 두리번거리다 안쪽에서 밖을 바라보던 일화를 보곤 그녀를 향해 "시은 엄마~" 하며 소리쳤다. 그러나 그녀는 두려움에 떨고 있을 뿐 동일의 물음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시은아~, 시은아~" 이번엔 어딘가 있을 딸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사내에게 끌려 밖으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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