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속박 束縛
현관문이 닫히는 순간 문틈 사이로 '악' 하는 짧은 신음이 들리더니 뒤이어 '띠리링' 하는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잠겼다.
잠시 스며들었던 소리가 궁금해진 소금이 다시 문을 열기 위해 도어록의 open 버튼을 누르려다 곤두선 검지 손가락을 거둬들이며 혼잣말로 구시렁거렸다.
"계집애 공연히 이상한 이야기를 해가지고…. 아이 찜찜해!."
(1시간 전)
"어떤 일이 있어도 오늘은 현관 밖으로 나가면 안돼 알겠니?"
"왜? 무슨 일 있어? 무슨 일인데?"
"아무튼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나가지 말라고 알겠지?"
"아이 미친년아 그러니까 왜? 왜 나가지 말라는 건데…? 어…. 너…. 혹시…!"
"맞아! 이번엔 너였어. 아파트에서 떨어진다고…. 아무튼 그러니까 나가지 마! 알겠지!"
"…."
"대답해! 알아들었냐고?"
"그래! 알았어" 소금이가 당황했는지 좀처럼 기운 없는 목소리를 내지 않던 그가 맥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만, 오늘만 참아!"
"그런데 말이야! 진짜 오늘만 참으면 되는 거 맞아?" 한소금이 물었다.
"어…. 글쎄…. 나도 확실친 않지만 아마 그러지 않을까?" 예상치 못한 소금이의 질문에 당황한 내가 말끝을 흐리며 답했다.
듣고 보니 내가 왜 오늘만 넘기면 상황이 호전될 거라 믿었는지 근거가 없었다.
"아니면…. 아니면 어떡하지?" 뒤늦게 밀려든 공포심에 떨리는 목소리로 한소금이 물었다.
그녀의 물음에 아무런 답도 하지 못한 나 역시 두려웠지만 그렇다고 내색할 수도 없었다.
누군가는 정신을 차려야 했고 굳이 나눈다면 그것은 내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만약 내가 정신을 차리지 않는다면 앞으로의 일을 수습하기는커녕 녀석의 칼부림에 놀아나는 꼴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런 일이 벌어진 원흉은 결국 나이기 때문이다.
길고양이의 죽음에서 시작한 것이 강아지로 그리고 일면식도 없는 사람에서 이제는 지인으로 확대되는 상황을 어떻게든 막아야 했다.
무엇보다 가장 친한 친구를 잃는다면 다음엔 누가 될지 장담할 수 없었기에 두려웠다.
그리고 꿈에서조차 차마 생각하기 싫은 로이에게 화가 되진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당장이라도 심장이 가슴을 뚫고 밖으로 나올 듯 마구 뛰었다.
"이러고 있을 시간 없는데…. 얼른 소금이 에게 가야겠어!" 요동치는 심장을 안정시키지도 못한 난 서둘러 주차장으로 향했다.
(통화 2시간 후)
한소금이 배달된 음식을 들이기 위해 현관문을 살짝 열었다.
평소처럼 문 옆에 바로 두었으면 좋았을 것을, 오늘따라 배달된 음식이 문 오른쪽 모퉁이에 놓여 있었다.
그 때문에 문턱을 넘어야 했지만 도연이와 나눈 통화 내용이 찜찜해 망설여졌다.
"에이! 하필이면…." 그녀가 혼잣말로 투덜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몸을 문밖으로 내밀기 싫어하는 그녀의 마음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
현관 밖으로 나가지 말라던 이도연의 당부뿐 아니라 그녀의 글이 현실이 된다는 것을 그녀 역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도연을, 말을 무시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더욱이 이번엔 자신이 대상자가 되었기 때문에 더욱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 미치겠네…. 어쩌지 집에 라면도 없는데…. 설마 이 정도는 괜찮겠지?" 스스로를 안심시키듯 중얼거리던 한소금이 아파트 복도를 좌우로 살핀 후 빠르게 달려 나와 배달 음식을 낚아채곤 다시 현관문 안쪽으로 들어왔다.
"휴~ 다행이다." 그녀가 음식을 먹기 위해 비닐을 벗길 때였다.
평소 창고 방처럼 이용하던 작은방에서 '야옹' 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 맞다! 창문 열려있는데…. 설마!"
서둘러 작은방으로 들어간 그녀가 열린 창으로 막 빠져나가는 호야의 꼬리를 보며 소리쳤다.
"호야~ 이리 와"하지만 소용없었다.
"에이 저게…. 호야야~" 서둘러 현관 밖으로 나온 한소금이 작은방 창문 앞에 서 있던 호야를 끌어안으며 "야! 언니가 불렀잖아! 너 계속 쌩깔레!" 하며 소리쳤다.
그때였다.
복도 끝 현정이네 집 문이 열리더니 부녀회 회장님이 나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와 엮여봐야 잔소리만 늘어놓을 게 뻔했던 한소금이 서둘러 잠긴 문의 비밀번호를 누르고 밀어 넣듯 자기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휴~' 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때 어느 틈에 도착한 부녀회장이 한소금의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소금 씨! 잠깐 나와봐요! 쾅! 쾅! 들어가는 거 다 봤어요." 날카로운 그녀의 목소리가 현관문 바닥을 기어들어 와 거실 전체를 메웠다.
체념한 한소금이 현관문을 열었지만, 현관문 안전걸이는 채운 상태였다.
벌써 여러 번 문을 열고 자신의 공간으로 들어와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훈계하는 그녀의 평소 습관을 잘 알고 있던 한소금이 더는 자신의 공간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의지처럼 느껴졌다.
"왜! 문을…. 마저 열어봐요!" 날카롭게 갈라지는 그녀의 목소리가 심장을 파고드는 것처럼 아렸다.
"오늘은 안 돼요! 그리고 저 식사하려던 참이었어요. 다음에 와주세요."
"다음엔 나도 안 돼요! 도통 만날 수가 있어서 말이지…. 어떻게 한 아파트에 사는데 얼굴 보기가 이렇게 힘들어서야. 부녀회장이 투덜거리듯 말했다.
"아무튼 오늘은 안 돼요!" 한소금이 물러섬 없이 목소리에 힘을 실어 말했다.
"아휴~ 소금 씨 도대체 호야 언제까지 키울 거예요? 내가 말을 안 하려 해도 안 할 수가 없네 키우려면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지나 말던가 이번 주만 해도 항의를 몇 번이나 받은 줄 알아? 조금 전 현정이 엄마에게도 항의받았어! 현정이가 고양이 알레르기가 있다고 하더라고 어쩔 거야 정말!"
도무지 쉼표라곤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쉼 없이 쏟아내는 부녀회장의 말은 여러 해가 지났음에도 도무지 적응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절래! 거리며 듣던 한소금이 혼잣말로 '저 아줌마 말하다 숨 못 쉬어 죽는 거 아냐?'라고 말하며 소리 없이 웃었다.
그때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부녀회장의 목소리에 섞여 들렸다.
"아! 소금인지 대금인지 모르겠는데 어지간히 좀 합시다."
낯선 사내의 목소리에 놀란 한소금이 '누구세요' 하며 물었다.
"내가 누군지가 뭐 그리 중요하다고 이봐요! 아가씬지 아줌만지 모르겠지만 당신 때문에 여럿, 피해를 보잖아. 사람이 말이야 물러설 줄도 알아야지 어떻게 자신만 생각해!" 사내가 화가 잔뜩 담긴 목소리로 따지듯 소리쳤다.
대전을 막 지날 때였다.
오랜 시간 운전을 해서인지 피곤하기도 했고 졸음도 슬쩍 눈꺼풀로 위로 뛰어올라 무게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다 창문을 열었다.
겨울 공기가 반듯이 도와줄 거란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역시 예상대로였다. 놀란 졸음이 물러났지만 잠깐이었다.
고속도로의 칼바람을 견딜 만큼 나는 건강하지 못했고 결국 창문을 닫아 나약함을 시인했다.
문제는 떠난 줄만 알았던 졸음이 어느새 목덜미를 타고 머리 위로 기어오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결국 녀석의 등쌀에 이기지 못하고 천안휴게소로 핸들을 틀었다.
앞쪽엔 당연히 주차 공간이 없을 거라 판단한 나는 처음부터 3번째 줄에 주차했다.
시동을 끄고 밖으로 나가 화장실로 이동할 때였다.
소금이 어머님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다리에 힘이 풀렸다.
'설마! 벌써 죽은 건가?' 하는 생각을 했지만 의문보단 확신에 가까웠다.
"예 어머니!" 몹시 불안정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도연아! 너 혹시 올라오고 있니?" 예상과 다른 차분한 목소리였다.
"예 어머니! 혹시 무슨 일 있나요?" 거짓말하다 들킨 아이처럼 불안했고 차마 물어선 안 될 물음 같아 죄스럽고 무서웠다.
"의식은 있는데 움직이질 못하네…. 네가 많이 불안해할 거라고 전해 달라더라"
"살아있어요? 다행이다. 어디가 얼마나 다쳤는데요? 병원이에요? 어디예요?" 안도의 마음 때문인지 감사함의 생리적 현장인지 눈물이 흘렀다.
"당분간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다고 오지 말라더라.…. 너희들 도대체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거니?" 어느새 차분했던 어머님의 목소리가 흥분했는지 격양된 어조로 물었다.
"어머니 죄송해요." 안도의 마음과 미안함 그리고 죄스러움이 함께 몰려와 나조차 정확히 어떤 감정인지 알 수 없었다.
집으로 돌아온 내가 Quill이 적어놓은 글을 다시 한번 읽어보았다.
한소금이 그를 밀어내려 했지만, 사내의 힘은 생각보다 강했다.
그녀를 번쩍 들어 올린 사내가 복도 담장으로 그녀를 들고 갔다.
그녀의 발이 허공에서 버둥거리며 사내를 걷어찼지만 그럴수록 저항은 심해졌다.
힘에서 밀린 한소금이 균형을 잡으려 몸을 비틀었지만 쉽지 않았다.
흥분한 사내가 그녀를 담장 밖으로 밀어내듯 던졌고 그 순간, 한소금의 발이 담장 가장자리에서 위태롭게 흔들렸다.
그녀의 눈이 커지며 차갑게 식어버린 공포가 목덜미를 휘감았다. 그리고 의지와 상관없이 짧은 비명이 '악'하고 터져 나왔다.
이어 그녀의 몸은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는 상태로 허공을 가르며 추락하기 시작했다.
손이 허우적거렸지만, 붙잡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게 결국 그의 몸은 아파트 아래 화단으로 그대로 떨어져 버렸다.
위쪽에서 화단을 내려다보는 사내의 눈이 매서웠으며, 입꼬리는 웃고 있었다.
흥분한 내가 아파트 아래로 떨어졌다는 문장만 가지고 그녀가 죽었을 거라 짐작했지만 돌이켜보니 그것 말고는 그녀가 죽임을 당했다는 내용은 없었다.
분명 내가 성급했지만, 불안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녀석이 점점 내 쪽으로 칼의 방향을 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다 로이 쪽으로 선회하면 어떻게 하지?라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더는 안 되겠어! 로이를 잃는다면 그까짓 돈이나 명성 따위가 무슨 소용이야." 혼잣말이었지만 영혼을 빠져나온 자신에게 말하듯 감정을 실어 말했다.
그때부터 녀석을 없애야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막상 그런 생각을 하고 나니 홀가분해지며 불안함이나 죄책감 같은 마음이 조금은 덜 느껴졌다.
진작 그래야 했다.
그랬다면 이유도 모른 채 죽어가는 사람들이 생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소금이도 다치지 않았을 것이고 민철희 기자의 죽음도 막았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Quill이 너무나도 꼴 보기 싫어졌고 결국 녀석을 땅에 묻기로 했다.
결심이 서자 집 뒤쪽, 감나무 아래 땅을 팠다.
굳이 감나무를 선택한 건 매년 감은 열릴 테고 맛있는 감이 열리는데 굳이 나무를 뽑아내지 않는 이상 그곳을 지킬 것이란 믿음 때문이었다.
더욱이 시천면엔 곶감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생계에 도움을 주는 나무를 뽑아낼 이유가 없었다.
문제는 겨울철이라 땅이 얼어 좀처럼 삽이 들어가질 않는다는 것이었다.
손끝이 얼어붙을 만큼 차가운 흙을 호미와 삽으로 파헤치며, 모든 두려움을 함께 묻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무릎높이의 구덩이를 파는데 족히 1시간은 걸린 듯했다.
구덩이 안으로 녀석을 던져놓는 순간,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 끝났다고 생각하니 잠시지만 편안한 마음도 들었다.
땅을 덮고, 흔적을 지웠다.
다시 집 안으로 돌아와 커튼을 치고 앉았을 때, 마치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모든 불안이 사라진 듯했으며, 어려운 수학 문제를 풀어낸 것처럼 뿌듯하고 후련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오랜만에 나는 숙면을 했다.
그러나 아침이 밝았을 때, 그 평온은 산산조각 났다.
너무 숙면한 탓에 9시가 다 돼서야 일어난 나는 평소처럼 커튼을 치기 위해 창가로 향했다.
커튼을 향해 손을 뻗는 순간 손끝이 아렸다.
"아~ 뭐지? 어라! 손은 또 왜이게?" 손끝에서 흐른 피가 흙에 굳어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순간 어제 손을 찢지도 않고 잤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러다 시선이 자연스럽게 책상 위로 옮겨졌고 그곳에 흙먼지를 뒤집어쓴 Quill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