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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머 Oct 12. 2020

동성애는 정신병이라 생각한다는 큰누나의 말

그날 난 내 방에 있었다. 무얼 했는지는 가물가물하다. 침대에서 뒹굴뒹굴하며 한낮의 게으름에 빠져 있던 기억밖엔 없다. 어렴풋한 장면이다. 다만 말 한마디는 뚜렷하게 기억이 난다. 오늘까지도 날 거슬리게 하는 “동성애는 정신병이라 생각해”라는 큰누나의 말. 그러고 보니 방문을 열어놨었다. 아예 닫자니 답답하고 그렇다고 완전히 열자니 개방감이 지나치고. 지금은 강아지별로 떠난 우리 마린이가 지나갈 만큼 길을 만들어놨었다. 그렇게 그 말은 틈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내 귀에 내려앉았다. 동성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작은누나의 물음에 큰누나는 그리 답했다. 시시콜콜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가벼운 태도로 가볍게 던진 문장. 나는 그 문장이 못내 거슬렸다. 경망했다.     

 

그때 나는 신경이 예민했을 시기였고 원래 큰누나와도 사이가 좋지 못했다. 감정의 골이 번거로운 일을 만들지 말라 명령했다. 게다가 거실엔 내가 없었다. 나는 대화의 주체가 아니었다. 거실까지 발걸음을 옮기기도 몹시 성가셨다. 구태여 근거를 마련해 망언에 대항하고 싶지도 않았다. 동성애가 정신질환이라는 오명을 벗어던진 지 오래라는 단편만 알고 있었지, 정확히 언제부터 그러했는지는 몰랐다. 1973년 미국 정신의학협회(APA)가 동성애를 정신질환에서 제외하고, 세계보건기구(WHO) 또한 1990년에 같은 결정을 내렸다는 사실. 이 사실을 조리 있게 전달했으면 좋으련만. 찾아보기 귀찮았다. 이런저런 나태함은 서로를 엮어 힘을 키웠다. 그러고는 반발심을 억눌렀다. 나는 결국 침묵했다. 큰누나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짐작 가는 배경은 있다. 종교. 하지만 이건 중요한 맥락이 아니다. 구태여 짚고 싶지도 않다. 그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나를 후회할 뿐이다. 권태로웠던 내가 싫을 따름이다. 


한 사람의 가치관을 ‘고칠 수 있다’는 오만한 생각은 하지 않는다. 다만 ‘고치지 않아도 될, 혹은 고치지 말아야 할’ 것을 고쳐야만 한다며 함부로 말하는 태도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는 생각은 있다. 불호와 혐오는 엄격히 다른 차원인 데다, 맥락이 거세된 혐오는 사회를 오염시킨다고 믿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주변에서 들리는 무가치한 말에 지나친 공신력을 부여한다. 가족이라는 이유로, 친구라는 이유로. 또 직장 상사라는 이유로. 그냥 넘어간다. 그 말을 믿어서라기보단 관계의 균열을 내지 않으려는 생활의 지혜일 테다. 밥줄이 걸려 있기도 할 테고. 관계는 그토록 무섭다. 망언이 발언이 되게 한다. 

     

하여, 지난날을 더듬어본다. 혹시 누군가 비슷한 생각을 내게 품고 있진 않을지. 나는 내 말에 지나친 공신력을 부여하고 있지는 않은지. 확고한 신념이라는 핑계로 말이다. 대단한 인권 선언을 할 요량도, 사회 변혁을 이루어낼 발언권도 내겐 없다만, 주변부에서 발화되는 말에 어떻게 대처할지 선택권은 내게 있다. 확실히. 


그렇다면 무가치한 말이 생명력을 얻어 날뛰는 꼴을 용납해야 하는가. 나는 수없이 많은 말들이 경거망동하는 꼴을 지켜만 봤다. 앞으로도 그러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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