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같은 팬데믹 시대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마트에서 과일을 살 때 이것저것 들춰보며 비교해보고 사는 행위가 대단히 눈치 볼 일은 아니었다. 적어도 우리 동네에선 그랬다. 어디 멍든 데는 없는지, 색깔은 선연한지, 질감은 어떠한지 가늠하려 두세 번 들었다 놨다 하는 행동이 누군가의 인격을 깎아내릴 만한 품위의 척도가 되진 않았다. 키위나 토마토처럼 애초에 포장되어 있거나 물렁물렁한 과일이 아니라면, 그 정도 쩨쩨함은 너그러이 허용되는 범위에 속했다. 과일은 원래 그렇게 사는 거라고 말이다.
가령 수박처럼 외관만 보고는 쉬이 당도를 짐작하기 힘든 과일을 살 때면 이리저리 두드려보며 괜스레 날카로운 척을 했다. 그럴 때면 나는 누구보다 현명한 소비자가 된 것 같아 흡족했다. 허술한 위장술인 줄 알고 있었지만 크게 상관은 없었다. 그렇게 직접 고른 과일이 무엇보다 맛깔스러워 보였으니까. 과일은 볼 줄 모르지만, 무언가에 관여하는 일이 곧 내가 선택한 사물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과 마찬가지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재작년 겨울의 일이다. 여느 때처럼 장을 보러 마트에 들렀다. 시금치를 사기 위해서였다. 채소와 과일이 서로 인접해 진열되어 있기에, 시금치를 사려면 과일 코너를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정말 이상한 광경을 목격했다. 아이를 데리고 장을 보던 동남아인 여성이 마트 직원에게 야단을 맞고 있었다. 순간 뭔가 싶었다.
“아이씨 그거 만지지 마. 만지지 말라고. 세 번이나 만져?”
40대쯤 됐을까. 어디서나 쉽게 볼 법한 인상의 아저씨가 짐짓 권위 있는 태도로 어찌할 바 몰라 당황하는 아주머니를 몰아세우고 있었다. 흡사 혼내는 모양새였다.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아주머니가 바나나를 사려던 와중에 몇 덩이를 들었다 놨다 했다는 거였다. 이것 참. 고객 갑질이 뉴스에 나오는 시대이기는 하지만, 되려 직원이 손님 꼬투리를 잡는 거 보니 어안이 벙벙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싶어 그냥 듣고만 있었다. 얼마나 조급한 마음이었는지 아주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잰걸음으로 자리를 떠나버렸다. 순식간이었다. 난 얼을 타다 이 상황을 목도하고 가만히 있어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객센터로 곧장 달려갔다. 두 명의 직원이 있었다. 결단코 보아선 안 될 장면을 이실직고하는 마음으로 사건의 전말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이 상황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물었다.
대답이 들려왔다. “아 그분 저희 과장님인데? 지점장께 말씀드릴게요.” 못내 끝이 찝찝했지만, 이 이상 내가 뭘 할 수는 없었다. 자리를 떠났다. 그날은 금요일이었다. 주말 동안 많은 생각을 했다. 이게 과연 투명하게 처리될까? 그냥 시늉만 하는 건 아닌가? 제 식구 감싸기가 일어나는 건 아닐까? 월요일 오전 9시가 되자마자 본사에 전화를 걸었다. 일을 키우면 지점 차원에서 구렁이 담 넘어가듯 은근슬쩍 넘기지는 못할 거란 판단이었다.
“마침 그쪽으로 교육 갈 일이 있거든요. 앞으로 이런 일이 없도록 단단히 주의 주겠습니다.” 본사 직원의 대답이었다. 썩 만족스럽진 않았지만 내 편협한 정의감을 고양하기에는 충분했다. 그렇게 일주일 동안 그날 일을 잊고 살았다. 며칠 뒤 마트에 들러 일이 제대로 처리되었는지 물었다. 문제의 직원은 주의를 받았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주의? 음... 본사 직원과 지점 직원이 언급했던 ‘주의’라는 말은 같은 단어였지만 묘한 어감의 차이가 느껴졌다. 이윽고 ‘진짜 그날 사건과 관련해 경고나 문책이 있었을까? 요식 행위만 한 건 아닐까? 감봉이건 정직이건 어떻게든 불이익을 줘야 마땅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뒤따랐다.
그 순간 나는 단순히 누군가를 징벌하겠다는 싸구려 감정에 도취했을 뿐이란 걸 깨달았다. 알량한 내 죄책감을 덜자고, 그러니까 내 마음 편하게 하자고 그랬던 거다. 일상에서 쌓인 스트레스까지 풀 수 있으니 더없이 좋은 기회였겠지. 내 행동이 후회됐다. 그때 내가 해야 했던 일은 누군가의 편이 되어주는 거였다. 외롭지 않게 같이 맞서주는 거였다. 죄인 취급을 받고 서둘러 떠나지 않도록 지지대가 되어 줘야 했다. 원래 과일은 만져보고 사지 않느냐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사는데 엄한 사람에게 뭐 하는 거냐고, 만지지 말아야 하는 거라면 포장해 놓아야 하는 거 아니냐고 맞불을 놓으며 그 자리에서 나서야 했다.
언젠가 친구가 독일 여행을 다녀와 들려준 일화가 떠오른다. 친구는 귀국 전에 공항 가까이에 있던 로컬 맥줏집에 들렀다. 줄을 서고 주문할 차례를 기다리는데 무슨 이유인지 순서가 계속 뒤로 밀렸다. 인종차별이었다. 그때 독일인 할아버지가 나서 친구가 주문할 차례라고 나서주었다. 아까부터 기다리고 있다고, 난 이 친구 다음에 계산대에 서겠다고. 그렇다. 독일인 할아버지가 내 친구에게 그러했듯이 나 또한 그분께 알려줘야만 했다. 인종을 구매력의 변별점으로 삼는 사람이 있겠지만 나 같은 사람도 있다고, 아니 있는 정도가 아니라 더 많을 거라고.
그때 나는 깨어있는 사람인 양 위선을 떨었다. 세상은 천박했지만 나는 비겁했을 따름이었다. 면죄부는 화풀이로 주어지는 게 아니다. 여죄는 여전히 내게 남아 있다. 도대체 이 부채감을 어떻게 덜어내야만 할까. 여전히 난 위선자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