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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나무 Sep 05. 2022

닿으면 닮는다

내가 아부지와 닮아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태어났으니, 아부지와 닮아가는 것이겠지. 그러나 함께하지 않았다면 이토록 닮진 못했을 테다. 나는 종종 아부지의 모습을 내게서 발견한다. 반응하는 태도, 차마 내뱉지 못한 말, 자세와 걸음걸이. 내게서 아부지의 모습이 보일 때, 오묘한 감정이 찾아오는데 아직 정리하지 못했다. 언젠가, 알게 될 것은 분명하다. 다만, 아직은 그때가 아닌 것이다. 감정이 오묘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우리 아부지도 사람인지라 장점과 단점이 있다. 누구나와 같이 완벽하지 않으신 것이다. 그래서 어린 시절에 '닮기 싫은 아빠의 모습'이 있었다. 사건과 상황을 경험하며 내게 남은 기억과 잔상들로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나는 저렇게 안되어야지.' 아차차. 혹시나, 아부지가 이 글을 읽으시면 이 부분에서 슬퍼하실 수 있겠다는 생각은 든다. 그러나 아부지를 비난하고자 쓰는 글이 아닙니다. 다시금 이어가자면, 닮기 싫은 모습이 있었다. 이는 어쩌면 당연하다. 아부지가 아들에게 보여주는 다양한 모습 중, 어찌 완벽하고 탄탄한 모습만 보여줄 수 있나. 흔들리고, 부족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의 나는 지금과 달리 어렸고, 너무나 너무나 부족했다. 그래서 그랬을 테다. 오늘날 돌이켜보면 그럼에도 살아내시는 모습에서 감동을 받는다. 아부지에게서 닮고 싶은 모습도 여럿이다. 아부지가 보여주신 근면과 성실, 도전과 지속, 선택과 책임. 내게 아부지는 좋은 교사이다.



내 나이 28살이다. 아부지는 종종 내게 이런 말씀을 건네신다. "나 28살에는 너 키웠는데." 우리 아부지와 어머니는 꽤나 일찍 결혼을 하셨고, 너무나 어린 나이에 부모가 되었다. 그들이 얼마나 미숙했고, 어려움을 느꼈을지 이제야. 이제서야 어렴풋이 알게 된다. 나는 아이가 없다. 아직 결혼에 대한 계획도 세우지 못했고, 자녀 계획도 마찬가지이다. 홀로 세울 수 없고, 모르는 것 투성이라 풀지 못할 숙제처럼 여기고 있다. 아부지의 말을 들을 때면 상상을 해본다. '나는 나 같은 아들을 키울 수 있을까?' 감히 상상해 보았으나, 처참히 무너졌다.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다시금 아부지의 위대함을 느낀다.



아부지와 술을 한 잔 마실 때. 우리는 울면서 웃는다. 울면서 웃는다는 것이 주는 감동이 있다. 이제는 웃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때는 울었던 것이고. 오늘 웃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렇게 아부지와 술을 나누며, 좋은 안주를 곁들이며 웃을 수 있어서 감사했다. 물론 아직도 모든 것이 해결된 것은 아니다. 우리 가정이 가진 문제와 여러 가지 해결해야 하는 것들. 그리고 아직 해결되지 못한 것들. 어쩌면 평생 안고 가야 할지도 모를 문제들이 우리에겐 존재한다. 타인에겐 아무것도 아닌 일일지 몰라도, 가족이라서 함께 가지는 것이다. 먼 미래에도 그랬으면 좋겠다. 지금 우리들이 가진 문제들을 이야기하면서 울되, 웃었으면 좋겠다. 언제나 후자는 웃음이기를 진심으로 바라본다.



최근, 지인의 지인 부고가 있었다. 지인의 지인이라 너무나 먼 사이이지만, 나의 지인이 가까운 사이라서 꽤나 많은 감정의 동요를 받았다. 고인의 소식을 접하고, 지인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의 감정이 동요된 것이다. 친구들과 만나는 자리에서 이 이야기를 꺼냈다. 모르는 분의 부고였기에 조심스럽게 꺼냈다. '이런 일이 있었다. 혹시 너희 지인 중에 돌아가신 분이 있어?'라는 맥락이었다. 다행인지 모르겠으나, 아직은 우리들에겐 지인의 부고를 경험한 일이 없었다. 그 때 문득, 얘들이 죽으면 나는 어떨까 싶었다. 친구들에게 말했다. 우리 중 누구 하나 죽으면 세상이 멈출 것 같다고. 내가 홀로 이룩한 인생 같아도, 친구들이 내게 준 영향은 결코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정말 진심이었다. 그리고 이어진 대화는 부모님의 죽음이었다.



아직은 우리에게 먼 이야기 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고작 28살이고, 우리들의 부모님은 60년대 생 이시다. 오늘을 기준으로 60이 채 되지 않으신 분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넘으신 분도 계신다만, 그럼에도 우리에겐 당장 닥칠 문제가 아닌 것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경향이 있었다. 친구들과 부모님이 언제 돌아가셔도 이상하지 않다는 대화를 나누었다. 그때에 함께 하자고, 뭐 그런 대화였는데. 핵심은 '메멘토모리' 였다. 직역하면 '죽음을 기억하라.'이다. 내가 알던 이야기라서 친구들에게 전했다. 우리나라에 한창 유행이었던 '카르페디엠'의 진짜 뜻을 아냐고 물었다. 당연히 친구들은 오늘을 즐겨라, 지금을 살아라. 등의 답을 했다. 나는 이게 외전 되었다고 알고 있었다. '카르페디엠' 그리고 '메멘토모리'가 함께 있었던 것이 본래 의미라는 것이다. "오늘을 살아라, 그리고 죽음을 기억하라"가 본래의 뜻인 것이다. 함께 기억하는 것이 너무나 중요하다. 오늘을 살되, 죽음에 대해 언제나 기억하라는 것이다. 그저 오늘을 즐기고, 지금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진짜 정신은 후자에 있다. 오늘에 충실하면서 죽음을 상기하는 것. 그게 진짜 의미인 것이다. 



우리는 그날 대화를 나누며, 부모님이 언제라도 돌아가실 수 있다는 사실과 우리가 지금 당장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로 했다. 



나는 아부지의 많은 모습을 닮았다. 아부지와 닿아 살아갔기 때문이다. 그 모습을 미루어보아, 나는 아부지의 죽음을 견디지 못할지도 모른다. 지금에야, 친구들과 함께 기억하며 살아가자고 다짐하며 강한 체했으나. 나는 몇 번이고 무너질 것이 분명하다. 우리 아부지는 아직도 할아버지 꿈을 꾸신다. 할아버지가 꿈에 나와서 아파하셨다, 춥다고 하셨다 등의 이야기를 하시며 아직도 마음 아파하신다. 그 기억이 내게 남아 닮아있다. 차라리 닿지 않았다면, 이 또한 닮지 않았을거다. 아부지의 존재를 몰랐다면, 감히 터득하지 못했을 테다. 터득한 삶의 방식은 외면할 수 없다. 닿아있기에 닮아서 이미 나의 것이 된 것이다. 몇 주 후면 할아버지 산소를 방문한다. 자주 못 가서 죄송한 마음이 언제나 있다만, 다녀오면 언제나와 같이 기분이 좋아진다. 아, 나는 할아버지를 생전에 뵙지 못했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내게는 할아버지이다. 아버지와 맞닿아 살면서 많은 이야기를 들었고, 그로부터 시작된 것이 정말 많기 때문이다.



닿으면 닮는다. 사자성어로는 근묵자흑이라고도 하고, 현대어로는 끼리끼리는 과학이라고도 한다. 이를 잊어선 안된다. 지금 나의 곁에 있는 사람과 닮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그렇다. 정말로. 그래서 환경이 중요하고, 삶의 방식이 중요한 것이다. 홀로 살아가는 것 같지만 결코 아니다. 일단 닿으면 닮기에, 우리는 닮아가고 있는 것이다. 닮는다는 것은 혼자 해낼 수 없다. 둘이기에, 여럿이기에 해내는 것이다. 그렇게 기대어 닮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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