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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앤 Aug 29. 2024

엄마를 기다리는 나

복합 트라우마 치유하기 (4) - 이젠 그 아이가 편안하기를

상담자의 자기분석은 자기회복을 위한 과정이며, 상담자의 자기 치료가 될 때 내담자의 치료가 가능하다고 하는 것을 공부를 할수록 더욱 더 인정하게 된다. 상담자로서 회복의 긴 여정에 있는 나는 ‘자기 분석’의 또 하나의 도구로 IFS (내면가족 시스템)를 만나게 되었다. 복합트라우마에서의 회복을 위해 IFS 적용하는 치유 시간여행을 떠나기 전, 미리 말하고 싶은 것은 나는 부정적아동기의 경험 ACE 점수가 높아 심각하게 멍든 아동기를 보낸 복합 트라우마 생존자라는 것이다.태어나면서부터 오랜 기간 예측 불가능하고 반복되는 정서적, 신체적인 학대와 방임에 지속적으로 노출되어 있었고 가족 중 어느 누구에게서도 따뜻한 지지와 공감을 받은 경험이 없었다. 


트라우마는 ‘상처’라는 의미를 지닌 고대 헬라어에서 유래된 말이라고 한다. 이것은 육체적, 심리적, 사회적 혹은 영적자아가 주관적으로 실존의 위협을 느낄 정도의 강렬한 충격을 경험하는 정신적 외상을 말하는 데, 과각성, 인지 및 관계성의 손상, 해리, 플레시백, 악몽등 통제하기 어려운 증상들을 동반하는 전인격 수준의 내적 상처로 정의된다.   전문가들이 구분하는 스몰 트라우마의 개념이 나에게 해당된다고 여겨진다. 이것은 전쟁, 재난, 성폭행, 사고등의 빅트라우마와 달리 자존감의 저하, 수치심이나 죄책감 등 일상에서 경험하는 부정적인 감정이나 사고를 야기하는 경험을 말한다. 어떤 객관적인 충격의 정도와 상관없이 다양한 일상의 부정적 경험이 트라우마를 야기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참조 : 김규보, 트라우마는 어떻게 치유되는가, (서울, 생명의 말씀사, 2022), 47-48.)

  

어릴 적 나는 나의 친 엄마가 언젠가 나를 데리러 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아무도 모르게 기다렸었다. 집에서 엄마한테 한바탕 욕을 먹고 매를 맞고나서 흐르는 눈물을 주먹 쥔 손등으로 훔쳐낼 때면 내가 함께 살면서 늘 나를 힘들게 하는 이 엄마가 나의 친 엄마가 아니어서 나를 미워한다고 생각했다. 어린 마음에도 친엄마라면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 줄 거라는 생각을 했나 보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나를 데리러 와야 하는 나의 친 엄마는 없었다.  지금 나와 살고 있는 엄마가 나의 친 엄마라는 것을 인정하기엔 어린 내 맘에 그것은 영원히 멈출 것 같지 않은 공포였고, 도저히 내 힘으론 빠져나갈 수 없는 진흙 구덩이 같았다.  누구나 처음 살아보는 인생이고 누구에게나 단 한 번 뿐인 인생인데, 하필이면 난 왜 여기서 환영 받지 못하고 살며 마음이 슬퍼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아마도 나에겐 반드시 나만 모르는 출생의 비밀이 있을 거야’라는 허무맹랑한 상상이 그나마 그때의 나를 살아남도록 붙들어 주었었는데 언제 인지 모르게 그 소망도 날아가 버렸다. 그 후로 나의 소망은 그곳을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는 것이 되었고, 내가 성장하여 언젠가 이곳을 떠나리라 바라며 그냥 거기서 그렇게 살아남았다.


아동기 트라우마는 어린아이 시절, 양육자인 부모에게 전적으로 의존해야 살 수밖에 없었던 시절에 일어난다. 아이는 어찌하든지 살아남기 위해 본능적으로 착한 아이가 되려고 노력한다. 부모의 마음에 들도록 완벽주의로 치달으며 혼란스러운 그 속에서 적응한다. 살면서 그들은 부모를 이상화 한다. 학대하는 부모들도 힘들게 살았다든지, 그래서 그들도 불쌍한 삶을 살았다던지, 비록 내게 가혹했지만 다 나를 위해 그랬다든지, 아니면 그땐 내가 맞을 만 했다고 하든지. 이런 말로 스스로 부모가 자신에게 가했던 일들을 부인한다. 


폭력이 가해지는 장소를 도망칠 수 없었던 아이는 때로 자기의 마음을 몸에서 탈출시킨다. 마음과 몸을 분리시켜 고통을 느끼지 않으려 한다. 내가 내 몸과 연결되지 않은 말로는 잘 설명될 수 없는 끊어짐의 해리증상을 만들기도 한다. 완벽주의자가 된 아이는 자라서 과격하게 자기비난을 하거나, 다른 사람들의 실수를 참지 못하고 비난하는 자가 된다. 


IFS Therapy를 통해 나를 만나는 과정에서 나는 그 어린 나를 만났다. 난 단발머리였고, 머리통 한 쪽 귀퉁이가 아프다는 것을 보고있는 어른이 된 나도 느끼고 있었다. 엄마가 머리 끄덩이를 몇 번 잡더니 아예 이불을 내게 덮어 씌우고는 발로 밟기 시작했다. 아팠지만 언젠가 끝나겠지 몸은 거기에 둔 채 어리고 불쌍한 나는 그 순간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끝이 났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하여간에 어린 나는 눈물을 주먹으로 쓱 훔치고는 이불 밖으로 나와 익숙한 듯 책상 같은 곳에 앉아서 숙제를 하려고 한다. 그 모습을 일정한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어른이 된 나는 그 어린 내가 어찌나 안스럽던지, 매맞고도 이쯤 별거 아냐 생각하며 그 밤에 숙제한다고 연필을 쥐고 있는 모습을 보니 눈알이 아프고 뜨거울 정도의 눈물이 솟구친다. 아이는 날 처다 보지 않고 계속 공책만 보고 있다가 눈물한번 또 손등으로 쓱 닦는다. 


어린 나에게 다가가 말을 해 본다.  많이 아팠지..? 네가 그런 가운데 있었다는 것이 너무 마음이 아프고, 네 마음이 너무 이해가 된다. 그때 만약에 이렇게 슬픈 너를 위해 무엇을 해 줄 수 있는 어른이 네 곁에 있었다면 너는 뭘 해달라고 하고 싶었니..? 이젠 내가 해 줄 수 있어.. 난 어른이 되었고, 널 보호해 줄 수 있을 만큼 커졌단다. 너를 때렸던 엄마보다도 내가 나이가 더 많아… 


그 어린 나는 나를 보며 내게 말한다. 날 좀 안아 줬으면 좋겠어~. 내게 괜찮다고 말해 줬으면 좋겠어..라고.. 

그랬구나..그랬구나. 이리와 내가 안아 줄게. 그리고 이젠 괜찮아. 이젠 안전해. 내가 영원히 너와 같이 있어 줄 께. 어린 내가 내 품에 안긴다. 머리통 한 귀퉁이가 부어올라 아팠던 기억이 생생한 느낌으로 전해진다.

아픈 기억들의 신경망들이 다발이 되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기억을 불러오고, 나는 그 아픔을 나의 사랑으로 새롭게 바꾸어 준다. 신경 가소성이다.  복합 트라우마의 흔적을 사랑의 기억으로 새로운 기억의 다발들을 만들어 준다. 


어린시절에 받은 비난과 폭력의 상처를 마주하는 일은 힘든 일이다. 어쩌면 날 힘들게 한 엄마를 비난하는 것이 될까봐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어린 내가 감당하기 어려웠던 막막하고 불안하고 외로운 시간속에서 내가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어린 시절의 상처는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 이제 어른이 된 내가 돌봐야 한다. 사랑을 하면서도 상처를 주었던 가족의 딜레마를 딛고 나의 내면의 힘을 믿으며 돌봄의 새로운 걸음을 시작했다. 


이젠 그 아이가 편안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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