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버킷리스트를 이루다
아주 오래전부터 막연한 로망이 있었다. TV에서만 보았던 체코 프라하에 가보는 것 그리고 프라하의 카를교에서 굴뚝빵을 먹는 것이었다. 단순했던 로망은 어른이 되면서 죽기 전에 꼭 한 번 해보고 싶은 버킷리스트가 되어버렸다. 언제든지 갈 수 있다고 생각한 체코 프라하는 밥벌이를 시작하면서부터 더욱 머나먼 곳이 되었다. 유럽을 즐기고 오려면 최소 일주일쯤의 시간이 필요한데, 월차 없이 다음 연도의 연차를 당겨서 써야 했던 사회초년생 때는 꿈도 꿀 수 없는 시간이었다. 경력을 쌓아 퇴사를 하고 쉬는 기간 동안 가볼 수 있지 않았을까? 시간이 있으면 돈이 없고, 돈이 있으면 시간이 없다. 버킷리스트는 잠시 미뤄둔 채 쳇바퀴 돌 듯 일상을 살았다. 어느덧 좋은 인연을 만나 결혼을 하고 나의 버킷리스트를 이루러 이곳에 왔다. 13시간이면 올 수 있는 체코 프라하에 7년이 걸려 도착했고, 이제 좀만 더 걸으면 카를교다.
카를교로 가기 전 근처에서 나의 요술봉이 될 굴뚝빵을 사기로 했다. 가는 날이 장날인지 후드득 떨어지는 빗방울. 드디어 카를교에서 굴뚝빵을 먹게 된 역사적인 날인데 비와 바람 따위는 방해가 되지 않는다. 옷과 신발이 젖는 것이 싫어 비 맞는 것도 좋아하지 않지만 오늘은 쫄딱 젖어도 좋다.
카를교 근처에 굴뚝빵을 파는 곳이 여러 곳 있었다. 우리는 그중에서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는 곳으로 갔다. 앉아서 먹을 공간은 없었고 테이크아웃이었는데 로테이션이 굉장히 빨랐다. 이쪽에서는 계산을 하고, 저쪽에서는 쉴 새 없이 굴뚝빵 반죽을 굽고, 또 다른 한쪽에서는 아이스크림과 각종 토핑을 뿌리고 있었다.
사실 굴뚝빵은 체코어로 'trdlo(뜨르들로)'라는 긴 원통형 모양의 빵이다. 체코의 전통 빵으로 겉에는 설탕과 시나몬 가루가 뿌려져 있고, 속은 비어있어서 다양한 토핑을 넣어 먹을 수 있다.
우리가 선택한 첫 번째 굴뚝빵은 슈크림 아이스크림을 추가한 굴뚝빵이다. 이제 아이스크림이 녹기 전 얼른 카를교로 가야 한다. 나의 버킷리스트는 '카를교에서 굴뚝빵 먹기'니까.
오른손으로는 신랑의 손을 잡고, 왼손으로는 굴뚝빵을 들고 나의 카를교에 도착했다. 수백 년이 되었을 울퉁불퉁한 돌바닥과 양 옆 동상들, 그 밑으로 유유히 흐르는 블타바강과 유람선, 강변으로 쭉 늘어선 알록달록한 아름다운 건물들. 현실에 지쳐도 기죽지 않고 낭만을 쫓고 로망을 품고 살던 서른넷의 나에게 주어진 선물 같은 풍경이었다.
드디어 카를교에서 굴뚝빵을 먹는다. 나의 버킷리스트를 달성하는 순간. 낭만의 정점이라고 생각하는 곳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가장 달콤한 음식을 나눠먹었다. 나의 로맨스는 성공적. 꿈이 현실이 되는 순간을 내 눈과 귀와 입에 담고, 내가 사랑하는 이의 눈에도 담았다.
비가 와도 사람들로 붐비는 카를교. 아마도 세상에서 사랑을 가장 많이 받는 다리가 아닐까. 내가 사랑한 것처럼 말이다. 프라하의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를 잇고 오랜 역사가 담긴 카를교에 나도 나만의 역사를 남겼다. 카를교에 다녀간 사람들 모두 각자의 추억을 이곳에 새겼을 것이고 오래도록 기억할 것이다. 나도 시간이 흘러 어느 결혼기념일에 다시 와보고 싶다. 지금도 블타바강은 변함없이 흐르고 있고, 나의 소중한 추억도 머릿속에서 유유히 떠다니고 있다.
버킷리스트도 달성했고 슬슬 배가 고파졌다. 점심은 프라하에서 꼭 먹어봐야 할 음식인 꼴레뇨로 정했다. 프라하에는 꼴레뇨 전문점이 많지만 우리는 맛집 중에 맛집이라고 알려진 Pork's(포크스)로 갔다. 유명한 곳이니만큼 대기줄이 있었고, 20분쯤 기다려서야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꼴레뇨는 프라하식 족발로 튀긴 족발이다. 특유의 향 때문에 한국식 족발을 못 먹는 사람도 쉽게 도전할 수 있다.
우리는 꼴레뇨, 양배추 샐러드, 양배추 수프, 콜라를 주문했다. 꼴레뇨는 포크를 갖다 대기만 해도 살이 먹기 좋게 발라진다. 겉은 바삭 속은 촉촉 아주 부드럽다. 치킨 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아무래도 튀긴 음식이라 느끼할 수 있는데 그때 양배추 샐러드랑 양배추 수프를 먹어주면 입 속에서 극락이 펼쳐진다. 이 정도의 맛이라면 1시간도 기다려서 먹을 수 있다. 완벽한 소확행 점심이었다.
예비 신혼부부를 위한 TIP.
포크스의 서버분들은 매우 친절했어요. 다만 팁을 내야 하더라고요. 식당 안은 물론 밖에도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아서 예약하고 가는 것을 추천드려요.
다른 날 카를교를 한 번 더 방문했다. 버킷리스트가 될 정도로 가보고 싶어 한 곳을 어떻게 한 번만 갈 수 있을까. 두 번째로 방문한 날은 비가 오지 않아서 둘러보기도 편하고 굴뚝빵을 먹기도 편했다. 이번 굴뚝빵은 다른 가게의 딸기와 생크림의 조합으로 정했다. 이것도 맛있잖아. 달콤하니 쌓였던 여행의 피로도 살살 녹았다.
사실 말이다. 사진만 보면 굴뚝빵을 평화롭게 먹을 수 있을 것 같지만 굴뚝빵의 달달한 향기 때문에 벌이 엄청 몰려든다. 특히 이 날은 비가 오지 않아서 벌이 더 극성이었다. 평소 나에게 벌레가 달려들면 팅커벨이 왔다며, '네가 꽃이어서 그래'라고 농담을 하던 신랑도 벌 앞에서는 농담을 그쳤다. 어쩔 수 없이 누구보다 빠르게 굴뚝빵을 입 속으로 해치웠다. 무엇이든 그렇다. 생각과는 다를 때가 있다. 여유롭게 카를교를 걸으면서 굴뚝빵을 먹고 싶었지만 달려드는 벌 때문에 순식간에 먹어버린 것처럼 말이다. 쫓기듯이 먹었지만 내 기억 속 두 번의 카를교와 굴뚝빵은 낭만으로 남았다.
카를교에서 바라보는 프라하성과 동화 속 나라 같다. 근엄한 왕과 왕비, 용감한 왕자, 철없는 막내 공주가 살고 있을 것 같다. 들숨에 낭만을 날숨에 로맨스를 얻는 듯한 프라하. 현실에 고달팠던 검은 머리의 이방인 두 명도 프라하에서는 한없이 부드러워졌다.
시간이 없어서 돈이 없어서 여태껏 카를교에 가지 못했다는 것은 나의 합리화였을지도 모른다. 함께 가고 싶은 사람이 없었을 뿐. 낭만의 정점인 카를교에 가기 위해서는 사랑하는 사람이 필요했고, 그 사람을 찾고 나서야 이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젊은 날의 낭만을 마음껏 만끽하며 버킷리스트를 이룬 것에 있어 열심히 살아온 나 그리고 함께 해준 그에게 고마운 마음이다.
프라하 사랑하기 좋은 도시며,
오늘은 사랑하기 좋은 날이다.